피난길에선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조재선 5 4,759 2007.03.10 0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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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길에선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조재선


즐비한 피난민 행렬 생사의 갈림길에서
필사의 탈출을 시도한다.

맹수를 피해 아프리카 광야를 질주하는 초식동물처럼
저 헐떡이는 심장소리
짙게 드리워진 사망의 먹구름이 야금야금 뒤따라오고…

모든 것 내어 던진 맨몸뚱이 두발은 진흙탕을 긁어 대고
썩어 가는 시체라도 부여잡고 의지하고픈 애착…

아! 삶과 죽음이 오버랩된다.
먹구름이 잠식하는 순간
평안하게 몸 녹여 주는 죽음
끝없는 피난길, 그 길에서 만난 낯선 평화

들풀의 향도,
하늘의 너그러운 미소도,
대지의 온화함도 생소한 평화

그러나,
난 아직 평생을 질주하며 뛰어야 할 가슴하나 매달려 있다.
깊게 패여 주홍글씨 새겨진 화인맞은 가슴
그것이 내가 모질도록 삶을 구걸해야 할 작은 이유이니

질주의 궤도속 그 절박한 피난길에서
나는 뒤를 돌아 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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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박방자 2007.03.10 22:14
  피난길하면...., 내 나이 어릴때 그리도 짧은 다리로 어른들 행열에 끼어 쫓아가느라고 피곤했던 기억이 어설프게 남니다. 뒤 돌아보면 았차 할 사이에 나만 내동댕이쳐있는 그때의 모습... 길 거리엔 나보다 더 어린 아이들이 홀로앉아 울고있고...피난길 행열에 끼지못하면  "너는 죽는다" 라고 사랑이 뒤섞인 호령의 말씀을하시는 우리 엄마의 지친 모습...검은 고무신이 다~~닳토록 어린 우리들은 열심히 걷고 걸어서 남쪽 지방으로 내려갔었지요...그런 사연속에서  억척같이 6,25 동난을 거쳐서 이기고 이곳 미국땅 까지와서 희로애락?의 맛을보는 강익?한 여인이되었나봄니다. 열심히 이웃을 돕고, 평화를 위해 삽시다.
air guard 2007.03.13 10:01
  Wonderful Poem......It touch my heart b/c we had painful experience war.
안정혜 2007.03.13 12:41
  피난길 하면 ... 제가 한살이었나 봅니다. (49년 12월6일이니까)  딸이 많으신 아빠는 길 거리에서 남자만 보면 군대로 잡아가는 실정이었답니다. 그래서 아빠와 아빠친구들은 3명이서 신발을 신으면 식구들을 기차타고 갈 식구들을 못 만날테니까 맨발로 산속을 보초를 피해가며 서울로 도망을 내려오시기로 하고 엄마와 서울이라는 곳에 내려오기로 하였답니다. 우리 엄마는 90세의 시어머니를 니야까(아마? 마차)에다 1월4일 추운 겨울 솜이불과 귀하게 구한 의약품등을 좀 챙겨 춥지 않으시도록 할머니를 따뜻하게 해서 초입에 내려오는데 " 아가마 ! 나 오줌마렵다!" 엄마는 그 힘들게 춥지않게 싸고 또 쌌던 이불을 제치고 소변을 보게 했답니다. 얼마나 여러번 해야 하는지 보초관들이 어디를 가느냐? 해서 결국 남한으로 도망가는 무리인줄 알고 도중 하차 집으로 되돌아가 90세 노모를 친척에게 맡기고 방공호에 가득찬 음식과 12개의 가게를 가지고 계셨던 터라 친척중 어려운 분이 기쁘게 대답을 하였답니다. 결국 기차 앞에 까지 4딸을 데리고 오긴 왔는데 인산인해의 기차꼭대기는 피난민 길이라 올라갈 자리가 하나도 없었답니다. 3딸은 (72살:큰언이)  그래도 기차꼭대기에 탔는데 꽃갈모자에 양털등걸이에 이불과 포대기를 씌어 나를 엎으신 엄마는 원래 작으신데...얼마나 걷기가 힘드셨는지??  기차 꼭대기에 다리를 띨 엄두가 나지 않았답니다. 기차는 떠나려고 하는데 3딸들은 기차꼭대기에서 울고 불고 .....한 젊고 건강한 청년이 우리엄마가 나를 엎은 포대기 끈을 꽉 잡더니 얼마나 높은 기차꼭대기에 우리를 덥석 올려 놓으셨답니다. 결국 새까맣게 탄 피난민 속에 끼어 굴 속을 지날 때면 아예 검정 숯검덩이를 뒤집어 쓰듯 한 몽으로 저희들은 긴 터널 여행을 했나봅니다. 저는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홍역을 치루었답니다. 상상 좀 해보세요 우리 엄마가 얼마나 힘드셨을까 ? 아이들 생일이 되면 "엄마 내 생일 내일이야!" 하는 철없는 아이들을 보면 늘 우리엄마를 생각하는 저는 네가 더 고생했니? 사실을 엄마야 ! 이 친구들아(?)" 생각하곤 하지요 결국 엄마와 아빠는 하나님의 인도로 상봉케 되었답니다. 훗날 아빠 다른 두 친구분은 칠성사이다사장이시고 서울은행장이 되셨었습니다. 딸만 가졌던 우리 부모님은 별루 ....가장 정직한 서민의 가정으로 자식을 키우신 소박하신 분들이었습니다. 아들을 끝내 기다리시던 부모님께서는 12월4일 2006년 천국으로 가고(우리 아빠 생신날), 12월6일2006년 장례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남동생이었으니 ....우리 누이들이 얼마나 가슴이 메어지는지 ....아직도 자다가도 생각이 나서 눈물이 글성이곤 하지요 옛날에는 다디미질(방망이로 두둘겨서 옷주름을 피는것)을 해야하고 나무를 잘라 불을 피우시고 연탄불을 피워야하고 석유곤로를 해서 저희들을 고이고이 키워주셨으니까요 엄마는 늘 나는 너무 바뻐 새벽3시 전에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하시곤 하셨습니다. 12개의 가게를 운영하실랴? 얼마나 바쁘시고 모양 한번 못 내보셨을까요?  제가 숙명여대 4년동안 1등으로 성적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한 명에게는 수업료 전면 면제였었습니다. 이인기 총장님, 이흥렬 학장님 계실 당시 였습니다. (72년) 그래서 수업료를 면제 받았을 때마다 매번 우리 엄마에게 치마저고리 한벌 씩을 꼭 맞추어 드렸었습니다. 물론 저는 자랑이 아니라 이흥렬 학장님께서 학교에서 지나가시다 저를 보시면 [제 등을 툭툭 두두려주시며] "학생은 보증수표야 ! Guarantee Check ! " 란 제 별명을 붙여주셨었지요 제가 제 자랑을 했나봅니다. 결국 세월이 이렇게 흘렀나봅니다. 나이가 제법 되어 조재선님의 피난길을 읽다 보니 ... 그만 ...... 참 조재선님! 허락없이 음악을 많이 빌려왔었어요 사실 제가 미국에서 고생만 하면서 살다 보니 다른 곳에 신경을 못 썼었습니다. 다행히 콤퓨터를 성경: 구약, 신약을 다 쓰다보니 타이핑 실력은 좀 되었었고 그저 머리 속에는 찬송가와 성경 뿐이니 시적인 면은 아예 거리가 좀 멀답니다. 그런데 박방자 선배님께서 최근 Bible ans Poem에 장소를 옮길 조언을 받은 뒤 귀가 너무 심심해서 허락없이 제법 음악을 가져 왔었어요 그동안 감사했어요 아무 불평도 않으시고... 이제는 제가 혼자 할 능력이 좀 되어가고 있습니다. 아직 갈 길은 물론...멀지만 ...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고,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이해가 좀 가지요 사실 어제 바쁘게 몇자 올렸었는데 너무 철자법이 틀려서 다시 쓰게 되었습니다. 요즈음 자라나는 세대들은 전쟁의 아픔을 모르고 지내지요 우라 아빠 살아계시는 시대에는 전쟁을 4번 지나가는 격동기의 살으셨다고 옛날 제가 한국에가서 장례식 할 때 목사님께서 말씀하시더군요 우리가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그 당시 같겠습니까? 우리 모두 힘든 이민생활 속에서 열심히 우리 동문들께서 같이 힘을 합해 서로 도와주며 인도해주며 시기, 질투하지 말고 사는 옛날 아름다운 우리 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조재선님 !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음악으로 도와주셔서) Thank You So Much !
안정혜 2007.03.13 13:05
  우리 아빠는 맨발로 평양에서 부터 서울이란 곳으로 도망을 내려오셨으니 요즈음 탈불자같은 상황이었겠지요 저도 아빠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후 지혜스러운 우리엄마는 발바닥이 모두 피로 물들어 있었답니다. 맨발로 밤낮으로 뛰어 도망을 오셨으니...그 당시 어려운 형편이니 [ 바늘에 실을 꿰어 실에 피가 빠져나오도록 한뜸 씩 한뜸 씩 발에 맺힌 피를 뽑아내어 ] 치료해 주셨답니다. 지금도 제가 이북에 있었다면 ... 지금처럼 마음놓고 예수믿으라고 전도도 할 수 없었을거예요 우리 하나님께서는 참 지혜스러우시답니다. 구구절절이 있는 곳에서 예수믿으라고 전 할수 있는 곳으로 저를 피난시켜주셨으니까요 [아버지 하나님 ! 눈동자처럼 지켜주시고, 머리털까지도 세신 우리하나님의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감초 2007.03.13 16:45
  정혜 동문님의 글을 읽노라니 지난 피난 길이 눈에 선하고 영화 필림 처럼 지나감니다. 특히 조재선님은 나이도 어리실?텐데 그 아픔을 "시"로써 잘 그리셨어요. 그래서 나이드신 동문님들께서 속 시원하게 글 들을 옮기시는 모양임니다. 참 기묘한 세상이지요. 6.25 당시 우리 동리에 기차 길을 끊어야만 교통 차단이 된다고 적군들이 계속 철로 길에다 퍼붓는 폭탄 파편 쪼각(날카로운 쇠 쪼각)들이 어찌 내게 맞지않고 꼭 앞이나 뒤로만 떨어졌는지요.... 어린 마음에 인정없는 적군들을 원망하며 시골 길에서 달밤에 하늘을 쳐다보며"평화" 평화가 그리우니 주여 어서 편안히 잠들게 우리들을 만들어 주시고 길을 인도해 달라고 간곡히 기도한 그때를 기억함니다. 왜 그리도 미국이란 나라가 그립던지요.그들이 도와줄때마다 "복 받은 나라 사람들이 바로 이사람들이구나...했음니다. 평화를 위하여 겨울이면 자기들 발에 동상이 박힌것도 모르며 남한을 위하여 전선에서 보초를 섰었담니다. 이제 그들이 70 고령이 훌쩍넘어 지난 날을 회상하며 참전용사들 회의때 마다 옛 이야기들을 나눌때면 저는 몸 둘바를 모를때가 많이있었음니다. 그래서 우리 부부와 장병들이 앞장서서 그들의 기념탑을 세우는데 32만불을 목표로 5년걸려 보람있게 완공했음니다. 이 나라를 위해서도 뭔가 꼭 남겨주어야 우리 2세 또한 대대 손손 평화를 누릴수있지않겠음니까??? 생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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