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American Dream!!! 이루지 못할 소망과 꿈은 없다.

안정혜 1 3,104 2011.06.03 03:26

22.American D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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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e 4, 2011


미주 복음방송, LA, AM 1190, www.kgbc.com

(213) 381-1190, 매주,토요일 오후 2:30 방송

© 2011 American Dream Builders Now, Inc.(Non-Profit Org.)

Paul Park 장로 & Grace Park 권사

(714) 719-3006 paulparkdream@yahoo.com


American Dream 이루기 위한, 생활의 지혜 시간 입니다.

애청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하나님의, 소망과 꿈을 이루시기 위한, 생활의 지혜를, 나누는 시간입니다.

안녕 하세요? 소망과 꿈을 이루는, 구체적인 방법을 나누며, 성취하시는 동반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Ø 오늘은, 소망과 꿈을 이루는데 필요한, 가지 생활의 지혜,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 한국인으로서 이루지 못할 꿈은 없다는 마음을 가지고 도전하면 목표는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수상 다이빙 스타, 세미 박사는 어떻게 American Dream 이루셨을까요?

둘째, 신체적인 장애자와 마음의 장애자 중에 누가 장애자인가요?

Ø 위의 말씀드린, 가지 질문에 대해서, 생활화 하실 있도록, 구체적인 방법을, 말씀 드리겠어요.

첫째, 한국인으로서 이루지 못할 꿈은 없다는 마음을 가지고 도전하면 목표는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수상 다이빙 스타, 세미 박사는 어떻게 American Dream 이루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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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혜 2011.06.18 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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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교포들이American Dream 을 갖고, 미국에 오셨습니다. 말할 수 없는 어려움과 역경을 겪으면서 각자의 꿈을 이루고 계십니다.
이민자로서의 고난도 있는데다가, 미국의 경제 상태의 악화로 더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생활에 쫒기다 보니 처음에 갖이고 이민왔던 꿈도 잃어버리고 사는 교포도 많은 것을 봅니다. 인종 차별이 아주 심했던 1940년대에 모든 문제들과 고의적인 차별 문화에서 성공한 세미 리  박사는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한국인으로서 이루지 못하는 꿈은 없다는 마음을 가지고 도전하면, 목표는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5월 30일, 2011년, LA 타임스 스포츠 쎅션에, 한인 이민 2세로, 올림픽 다이빙에 미국 대표로 출전해 두 차례 연속 금 메달을 딴 세미 리 (90)박사가 “인종 차별”을 극복한 영웅으로 크게 소개 되었지요.
미주 교포 뿐만아니라 우리 모든 한국 사람들의 자랑입니다.

세미 리 박사처럼 교포 어느 누구던지 자기의 탈렌트를 살려서 열정을 갖이고 꾸준히 노력한다면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을 증명했습니다.
특별히 주님이 주신 은혜와 은사를 깨닫고, 하나님의 꿈을  쫒아가시기 바랍니다. 어려움이 있더라도 꿈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꿈은 반듯이 이루어 진다는 것을 믿고 실천 하시기 바랍니다. 

중앙일보와 세미 리 박사께서 인터뷰 하신 것을  알려 드리도록 하지요.
그는 하와이 사탕수수 이민자의 2세로, 1920년생이니까, 현재 91세가 되네요. 한국인이란 “나의 뿌리이고, 긍지와 자부심” 이라고 했습니다.

고등학교때 한 백인 친구가 파티에 초청했답니다. 아시안은  나 하나 뿐이였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파티가 시작하지 않아서 친구에게 물었답니다. 그 친구는 “내 부모님이 파티에 아시안이 오는 줄 몰랐다며”
그 때문에 파티가 취소 되었다고  말했지요.
 
그 자리에서 빠져나온 나는 아버지의 식료품 가계로 달려가서 한국인인게 싫다고 아버지를 붙잡고 많이 울었답니다. 그때 아버지가 했던 말을 평생 새기며 살고 있답니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에 자부심과 긍지를 갖이면, 아무도 나를 무시 하지 못한다. 하지만 내가 나의 혈통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이 없다면 앞으로도 계속 무시 당할것”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종 차별이 심했던 1930년대에 한국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그때가 12살 때인데, 1930년대 미국은 일 주일에 단 하루, 수 요일에만 유색 인종이 수영장을 쓸 수 있었지요. 그 당시 같이 다이빙 연습하던 흑인 친구와 함께 수 요일만 기다렸고, 그 날은  하루종일 연습 했지요. 인종 차별이 있었지만 나는 남 보다 배로 노력해LA 인근  벤자민 프랭클린 고등학교에서 소수계로선 처음으로 학생회장이 됐고, 존재감없는 한국인을 알리기 위해 항상 두 세배 노력 했습니다.

제대로 다이빙 하지 못하면 심하게 다칠 수 도 있지요. 목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 죽을 수 도 있답니다. 젊은 시절 강도 높은 다이빙 훈련을 많이해 지금도 허리와 등이 않좋지요. 처음 10미터 플랫폼에 올라 섰을때 두려웠지만 “나는 중국인도, 일본인도 아니다. 나는 Korean이다” 라고 외치며 뛰어 내렸지요.

올림픽에 간 이유는 항상 올림픽 챔피언이 되고 싶었지요. 아버지의 소원대로 의사가 됐지만 당시 미국에서 “한국인”은  존재감이 없는 민족이였습니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존재감을 금 메달을 따서 알리고 싶었습니다. 12살때부터 올림픽 스타가 되는 것이 꿈이였지요. 흑인  친구와 함께 다이빙하면서 이 방면으로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어린 시절에 한국에 대한 애국심이 강한 소년이었던 같습니다. 하루는 아버지로부터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해 수 많은 한국인들을 죽였다고”  이야기를 들은뒤 이웃 일본 사람집에 찿아가 대문을 쾅쾅 두드리며 싸우려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일로 아버지께 엄청나게 꾸중을 들었습니다.

삶을 살면서 가장 어렵고 도전적인 순간은 USC 의대에 다닐때 였습니다.
나의 꿈은 의사가 아니었지요. 아버지는 내가 의사가 되어 미주 주류 사회에서 기 죽지않고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결국 아버지가 돌아가신뒤 꿈을 이루어 드리려고 의대에 지원했지요. 6.25 한국 전쟁 말기 군의관으로 참전해서 영등포에서 군의관으로 일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참혹한 상황이였습니다. 내 조국이 이런 비참한 상황에 처한 현실을 목격하면서 더욱 한국인으로서 세계적인 인물이 되어야 하겠다는 결심을 다졌습니다.

평창 동계 올림픽 명예 홍보 대사로 임명된뒤 2000년대에는 한국을 여러 차례 방문을 했지요. 정말 한국은 갈때마다 눈을 의심할 정도로 발전한 모습을 보여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끼게 합니다. 전쟁 동안에 겪었던 한국의 모습과는 비교도 할 수가 없이 정말 장한 민족이고 대단한 나라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살면서 많은 것을 성취했습니다. 자식들도 낳았고, 손자들도 보고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할아버지”라는 타이틀은 내가 지금껏 받은 어떻한 수식어 보다 값지다고 생각합니다”. 

세미 리 박사의 인생의 모토는 “꿈을 좇아가는 삶을 살으라”
절대 꿈을 저버리지 말아라.당신이 먼저 꿈을 저버리지 않는한 꿈은 이루어진다. 라고 도전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세미 리 박사의 생애를 돌아보며 우리 교포들이American Dream을 이루는데 배우고 실천해야 할 것을 나누도록 하지요.

1). 그가 12살인 어린 나이때, 올림픽 참피언이 되겠다는 꿈을 갖고 끝까지 추구해서 그의 꿈을 이루었습니다. 그가 말씀하시고 실천하신대로 “꿈을좇아가는 삶을 살아라”  절대로 버리지 말아라. 꿈을 저버리지 말아라. 꿈을 저버리지 않는한 이루어진다.

2). 인종차별이 극도로 심했던 당시에 중학교와 고등 학교를 다녔습니다.  주위의 차별 대우를 받으면서도 한국인이라는 긍지를 잃지않고, 고등학교 학생 회장까지 선거에서 선출된 것입니다.

3). 한국인으로서, 미국에 올림픽 금 메달을 두 번씩이나 명예를 갖여왔지요.  미국뿐만 아니라, 애국심으로 한인들에게 명예를 갖다준 것입니다.

4). 일찌기 자기의 소질을 발견하고 꾸준히 개발했습니다.  부모님들이자녀들의 소질과 적성을 찿아 권해야 되겠지요.

5). 인정차별을 극복한 것은 물론 전 미국 대표로 뽑혀 2번이나 올림픽 금 메달을 딸 수 있도록 몇배의 노력을 했다는 것 입니다. 우리 한인 교포들은 물론 한국인으로서 세계 어느 나라에 살던지 온갖 노력을 다해서 보람있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5: 14절-16절에,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둘째, 신체적인 장애자와 마음의 장애자 중에 누가 더 큰 장애자인가요?

장애자라도 American Dream을 이루실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장애자라면, 신체적인 장애를 갖인 사람들을 말하지요. 그들은 온갖 장애를 갖였으면서도 그 많은 장애를 극복하고 보람있는 생활을 합니다. 그와 반대로 신체적인 장애는 없는데도 자기는 여러가지 이유로서 못한다는 사람들도 많이 봅니다.

중앙일보 5월 28일, 2011년, 15살에 차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장애인은 자신이 장애인이 아니고  “다를뿐” 이라며, American Dream 을 이룬 이야기를 알려 드립니다.

어렸을때 불의의 교통 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왔지만 이를 극복하고, 뉴욕의 대표적인 병원에서 약사로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병원 운영 시스템을 계획하는데 중추적인 역활을 하는 한인 1.5세인 린 김(47) 입니다. 코넬 대학 병원등 네개의 병원을 운영하고있는 뉴욕, 프레스비테리안 병원 혁신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1만 7000여명이 일하는 거대한 병원에서 총 20명뿐인 위원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네개의 병원을 총괄하는 사람은 김씨를 포함해 단지 세명뿐 입니다.
그는 현재 심장 항암 치료의 안전문제 개선등을 위해4개 병원 암 센터 디렉터들은 물론 전문의등과 매일 미팅을하며, 연구를 이끌고 있습니다.
이번주에만 모두 15차례의 미팅을 했다는 그는 “일 하는 것 그 자체가 감사하다고, 너무 즐겁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한때 죽고 싶었답니다. 김씨가 미국에 온것은 13살때인 1977년, 김씨의 부모는 메릴랜드주 볼티모어로 이민와 그로서리를 차렸습니다. 늘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김씨는 곧 우등생이 돼었습니다. 춤을 좋아했고, 치어리더를 하며, 백인들이 대부분이던 학교에서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15살이였던 해의 봄,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한 친구가 몰던 스포츠카를 타고 쇼핑을 가던중 차량이 전복되는 대형 사고를 당했습니다. 이 사고로 몸 안팍에 많은 피를 흘리고 척추뼈도 부러졌습니다. 신경을 다쳐 결국 하반신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사춘기 소녀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8개월동안 병원에 입원했고, 이후에도 재활병원에 있어야만 했지요. 그 곳은 이 세상 모든 장애인이 모인 곳 같았어요. 여러번 식당에서 식사를 한뒤 칼을 숨겨 벼개밑에 숨겨 놓았어요. 목숨을 끊으려는 것이었죠. 실제 스스로 불을 질러 소동이 벌어진적도 있었죠. 그때부터 1주일에 한번 이상은 정신과 치료도 받았다고 합니다. 김씨는 “당시 나를  담당했던 닥터 고든이라는 세라피스트가 나를 살렸다며, 제가 처한 현실을 받아드리는 법을 알게 해 주었다고 밝혔습니다.

부모의 헌신도 큰 힘이었죠. 장애인으로 어떻게 옷을 입고, 밥을 먹고 운전할 수 있는지, 간난 아이가 걸음마하듯 하나 하나 배웠죠”. 

김씨는 사고후 1년반만에 병원을 나와 학교로 돌아갔지요. 뒤 떨어진 공부를 따라잡기 위해 매일 새벽까지 공부했습니다. 떨어진 성적은 제 자리를 찿았고 고등학교 졸업때 우등상을 받기까지 했습니다.

첫 홀로서기 기회가 왔습니다. 그는 집에서 가까운 메릴랜드 대학에 진학해서, 생화학을 전공하고 3년만에 우등생으로 조기 졸업했지요. 처음에는 의대를 가려했지만 육체적으로 덜 힘든 약사를 하라는 아버지의 조언으로 약대를 선택하기로 했습니다.

그가 선택한 곳은 펜실바니아주의 필라델피아 약대로 부모님과 처음으로 떨어지는 순간이었지요. “대학때도 사실 아버지께서 차로 학교까지 데려다 주셨어요. 그때까지도 제 손과 발이 되어 주신거죠. 처음으로 혼자 살아야 했기때문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혼자 산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였죠. 하지만 그는 나약해 질때마다 기도를 하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그 결과 수석으로 학교를 졸업했죠.

남편과는 대학 4학년이던 1987년 남편 콜린 김씨를 만났습니다. 당시 캘리포니아에서 공대를 다니던 남편은 부모가 있는 필라델피아에 와 있다가 김씨를 만나 한눈에 반했죠. 2년뒤 결혼은 김씨에게 큰 기회를 가져다 주었죠.

MIT와 스텐퍼드, 카네기 멜론등에서 공부한 남편을 따라다니며, 보스톤의 베스 이스라엘 병원, 스탠퍼드 대학병원, 존스 홉킨스 병원등에서 임상 약사로 근무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1996년 뉴욕 프레스비테리안 웨스트 체스트 병원에 임상 약학과 디렉터로 영입되었지요

어떻게 병원 개혁 선두자가 되었느냐고요?
김씨는 2003년 겨울 어느 날 병원의 최고 운영 책임자 (CEO)인 밥 켈리오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병원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새로 구성하는 혁신위원10명중 김씨를  추천하겠다고 했습니다. 위원회는 그야말로 007의 제임스 본드처럼 교육을 받았습니다. 당시 병원측은 최고중의 최고만 뽑아 병원을 싹 바꾸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처음 시작한 것은 인터뷰였지요. 각 병원의 응급실장 등 책임자들을 개별적으로 만났습니다. 각 병원에 30여명씩 120명이 넘는 사람들로부터 응급실 운영의 문제점들과 해결책등을 들어 하나 하나 기록했지요. 매일 오전 5시, 또는 6시에 나가 퇴근후에도 다음날 오전 2시까지 일 하기를 밥 먹듯이 했죠. 미팅과 연구끝에 800만 달러의 예산으로 응급실 대 수술에 들어갔습니다. 결과는 좋았습니다. 응급실에 환자들이 도착해 응급치료를 받고 병실로 이동하기까지 24시간 걸렸던 컬럼비아 대 병원의 경우가 12시간으로 단축 되었고, 코넬대 병원은  18시간에서 9 시간으로 단축 되었지요.

2006년 병원측은 그에게 다시 혁신 위원회에서 일 하길 주문했지요. 이제는 심장병과 암 관련 안전 문제를 줄여야하는 임무가 맡겨졌습니다. 김씨는 지금은 익숙해져 처음 할 때에 비해서는 스스로 여유를 가지고 있지만 책임감은 더 커졌습니다.

그는 최근 우연히 정보가 없어서 치료를 못 받는 한인들을 접하면서 한인 사회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한인들은 문화, 언어, 재정등 여러 장벽때문에 좋은 의료 혜택을 못 받는 경우가 많아요”.  앞으로 의료혜택의 기회를 한인들이 더 누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연구하고 싶답니다. 그리고 그 분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도 찿고 싶다고 했지요.

그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내가 장애인이라는 표현을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나는 스스로 장애인이라고 생각하고 살지 않을 뿐 아니라 장애자가 성취하는데  전혀 방해가 않되기때문”이라는게 그의 이유였지요.

김씨가 가진 삶에 대한 열정과 도전 정신으로 그에게는 “장애”는 장애자가 아닌 피부색이 다르고 모습에 차이가 있는 것과 “다름”의  하나일뿐 이었습니다.

위의 김씨의 격려되는 간증은 모든 사람들에게American Dream 이 누구에게나 가능하다는 것을 산 증인으로서 도전과 희망을 줍니다. 그의 생활에서 여러가지 삶에 교훈이 되는 것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1). 교포 자녀 1.5세가 단지 15살에 교통 사고로 평생 하반신이 마비된 장애자로서 수 많은 장애를 극복하였습니다. 

2). 마음의 심한 괴로움으로 자살까지 여러번 생각했지만 주님을 믿는 성도로서 기도의 생활을 하므로서 절망에서 희망을 찿았지요.

3). 일년 반 이상의 병원 생활로 뒤 떨어졌던 고등학교 학업을 주야로 공부해서 우등생으로 졸업했답니다.

4). 부모님의 꾸준한 도움과 격려로서 육체적으로 심리적으로 위로와 용기를 갖였습니다.

5). 자기 적성과 실정에 맞는 전공 과목인 약사 과정을 택해서 열심히 공부해서 수석으로 졸업했습니다.

6). 하반신 불구자인데도 불구하고, 이를 이해하며, 사랑하고, 후원해주는 남편을 만난 것 입니다. 보통 사람이면 불구자인 장애인과 결혼할까요?
하나님의 섭리라고 믿지요.

7). 여러 큰 병원에서 약사로 일하면서 그냥 일만한게 아니고 항상 더 효
과적으로 운영 방법을 개발하면서 병원 제약실을 도왔습니다.

8). 김씨에게는 항상 개혁하며 보다 나은 시스템을 개발하는 잠재 능력이 있었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는데 두려움이 없이 기회를 포착했지요.

9). 개혁 위원으로 선택되었을때 120명을 인터뷰해서 정보와 자료를 묻고 Team Work로 놀라운 성과를 냈습니다.

10). 맡은바 책임을 다하여 새로운 방법을 찿으려고 새벽 5시부터 밤 늦게까지 열심히 일하고, 연구했습니다. 병원의 다른 직원들처럼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을 하지않고, 온 마음과 시간과 정력을 쏟아 최선을 다했습니다.

11). 이민자의 딸로서 1.5세가 교포사회가 아니고 미국 주류의 Top Class 병원에서 최고 경영 개혁 위원으로American Dream 을 이룬 분입니다.
모든 이민자에게 희망과 도전을 주는 자랑스러운1.5세입니다.
언어 장벽, 문화의 차이, 재정문제, 장애문제 등은American Dream 을 이루는데  문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합니다. 애청자 여러분과 우리 모두 보람있는American Dream 의 확신을 갖이시고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안내의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어요>

American Dream 사역은, 비 영리 단체로서, 봉사를 통한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소망과 꿈을 이루도록, 도와주는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갖고있는, 잠재 능력을 개발하여, 소망과 꿈을 이루시며, 남을 돕고, 섬기는사역입니다.
많이 동참 하시기 바랍니다.
     
            <참고사항을 알려 드립니다.>

만약에 Radio 방송을 못 들으실 경우에는 미주 복음방송의  Website, kgbc.com으로 들어가셔서, Program에 가신 다음, 상담과 정보 를 클릭하시면, AMERICAN DREAM을 다시 듣거나, 청취란에서, Message를 다시 읽어 보실 수 있어요.  친구분들에게,  많이 알려주시면, 좋겠네요.
 Paul Park Cell# (714) 719-3006

 오늘의 소망과 꿈을 이루는데, 필요한 생활의 두 가지를, 요약해서 말씀드리고, 마치려고 합니다.

첫째, 인종 차별을 극복하고 영웅으로 소개된 다이빙 스타, 세미 리 박사는 미국인과 한국인으로 자랑스러운 American Dream 을 이룬 Model 입니다. 그의 인생의 모토는 꿈을 쫓아가는 삶을 살고,  절대  꿈을 저버리지 말며, 꿈을 저버리지 않는한 꿈은 이루어 진답니다.

애청자 여러분,  주님의 보혈로 구원을 받고, 선택된 성도님들은  무슨 목표를 향해 인생의 길을 달려가야 될까요?  소망과 꿈을 이루려면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상은 올림픽 금 메달 보다 더 크고 보람있는 것이 아닐까요?

마태복음 6:33절에,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빌립보서 3장 12절-14절에,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둘째, 소망과 꿈을 이루는데는 신체적 장애보다 더 큰 장애는 마음과 생각의 장애입니다.

하반신이 마비된 장애인 린 김은 한때 죽고 싶은 마음까지 있었지만 주님을 굳게 믿고, 기도로 간절히 간구하며 최선을 다했습니다.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미국 주류 사회에서 최고 경영 개혁원으로 인정받고 성공 했습니다.

애청자 여러분을 위한 하나님의 소망과 꿈이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15절에,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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