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drey Hepburn #1. !!!
"난
발레리나가 될 거야"
오드리 헵번은 발레를 좋아하는 꿈 많은 발레리나로
무럭무럭 자라났다.
하지만 170센티미터에 달하는 큰 키가 문제였다.
발레리나는 신체적인 조건으로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었지만 무대에 서고 싶다는 그 녀의 욕망은
멈출 수가 없었다.
헵번은 짐을 꾸려 영국으로 건너갔다.
연극과 영화에 출연하며 자신의 꿈을 향해
한 걸음씩 걸어갈 즈음
우연히 브로드웨이 연극 〈지지〉에 캐스팅이 되었다.
이 작품을 계기로 〈로마의 휴일〉에 출연할 수 있었다.
오드리 헵번의 사실상 데뷔작 〈로마의 휴일〉은
그녀를 일약 은막의 여왕으로 부상시켰다.
특히 공주님의 사랑이라는 동화 같은 주제가
로마를 무대로 펼쳐지면서 숱한 여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공주 역을 맡았던 <오드리 헵번>과 신문기자 역의
<그레고리 팩>은 외모뿐만 아니라
뛰어난 연기력으로 호평을 받았다.
이 작품으로 그녀 는 소위 '헵번 스타일'이라는
솟커트 헤어스타일을 유행시키기도 했다.
이 영화는 운도 좋았다.
영국 왕실의 유명한 로맨스인 마가렛 공주와
타운젠드 대령의 비련이 이슈가 되고 있을 때
공개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특히 소원의 벽에서의 장면은
지금도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으로 꼽힌다.
이 작품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그녀는
제7회 영국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과
제26회 미국아카데미와
제19회 뉴욕 비평가 협회 상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스타덤에 올랐다.
그후 〈사브리나>, <전쟁과 평화>,
<티파니에서 아침을>,<마이 페어 레이디>,
<언제나 둘이서>, <백만달러의 사랑>등의
영화에 출연했다.
1989년에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메가폰을 잡은 영화
<영혼은 그대 곁에〉에서 우정 출연으로 등장해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 영회는 오드리 햄번의 공식적인 마지막 작품이었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제2막의 인생이 시작되었다.
그해 그녀는 유니세프 친선대사가 되었다.
우연히 참석한 기금모금 행사에서
자신의 영화배우 경력이 세상 사람에게 관심과
신기함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직도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사람이 많구나.
영화의 힘이란 정말 놀랍네!"
그녀는 유니세프를 찾아갔다.
유니세프가 그녀를 원했던 것이 아니라
그녀가 먼저 유니세프에 손을 내민 것이다.
헵번은 취임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 자신이 이차 대전 직후 유니세프로부터
식량과 의약품을 지원 받았기 때문에
유니세프가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는가를
증언할 수 있습니다.
유니세프에 대한 감사와 신뢰의 마음은
평생 변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전쟁 피해 아동의 구호와 저개발국 아동의 복지
향상을 목적으로 설립된 국제연합 특별기구인
유니세프는 백일해 때문에 죽음을 경험했던
오드리 헵번에게 숙명처럼 다가왔다.
6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유니세프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다.
보수는 1년에 1달러뿐이었고
교통비와 숙박비 외에는
아무 것도 제공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열정을 다해 헌신했다.
"오드리 헵번이 인기가 떨어지니까 별 쇼를
다하는구만."
"몇 달 저러다가 말겠지"
"자기가 아직도 앤 공주인 줄 아나봐"
언론과 세상사람들은 그녀의 행보를 곱지 않게 보았다.
과거의 은막 스타가 세상의 주목을 받고 싶어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굶주림과 병으로 죽어가는 어린 이들의 슬픈 현실을
세상에 알렸다.
곤경과 죽음에 처한 아이들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그건 죄악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발길은 아프리카 전 지역을 비롯해
방글라데시, 엘살바도르 등 50여 곳이 넘게 이어졌다.
비행기를 타고 버스로 이동하는 험난한 여정이었지만
백발의 노구를 이끌고 걸어가는 그녀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어린이 한 명을 구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어린이 백만 명을 구하는 것은
신이 주신 기회입니다"
그녀의 끝없는 행보에 언론과 사람들의 시선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병에 걸린 아이들을 스스럼없이 만지고 고통 앞에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전 세계인의 가슴을 울렸다.
각국에서 구호물자와 기부금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저게 뭐지요?"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