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영원한 며느리의 숙제..(옮겨오는 글)

skagway 1 4,610 2006.09.22 22:59
행복한 고민

김 옥 진




시댁에 제사라고 해야 1년에 한 번 뿐인데도 한 달 전부터 내 머리 속은 온통 그 생각으로 무겁기만 하다. 그 일을 지금까지 10년도 훨씬 넘게 해와 이골이 났을 법도 한데 해가 갈수록 더하다. 며느리가 나 혼자라지만 이제껏 아무 잡념 없이 치러 왔는데 이제 나도 일하기가 버거워지는 나이가 된 것인가, 아니면 꾀가 나는 탓일까.

그러나 같은 제사라 해도 친정의 아버지 제사는 기일 며칠 전에 어머니께 안부 전화 한통으로 시작하여 당일에 약간의 준비물만 챙겨 가면 그만이다. 출가외인이라는 말이 실감이 나는 때는 바로 이 때다. 남동생과 올케가 세세한 준비는 맡아서 하고 아직 어머님이 계시기에 큰딸이라고 해서 큰 의무가 지워지지는 않는다. 어디까지나 권장사항일 뿐이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친정에서는 제사 때마다 새로운 이벤트를 만들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아버지 살아생전의 추억담을 글로 써서 낭독하는 시간을 가졌던 것이다. 제사가 끝나갈 무렵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는 시간에 그원고를 우리 형제 중 누군가 낭랑하게 읽어 내려가는 것이다. 원고는 물론 큰딸인 내가 썼다.

그런데 그 첫 시도는 제사에 읽으려고 쓴 것은 아니었다. 수필을 공부하다보니 자연 아버지에 대한 것이 첫 소재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돌아가셨기에 날이 갈수록 생전에 느끼지 못했던 아버지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이 더해가 쓰는 횟수가 잦아졌다. 어떤 소재든 아버지와 관계가 없는 소재가 나에겐 없었다. 그토록 아버지가 나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분이 없다는 것을 뒤미처 깨달았다. 어느 날 그 글을 본 동생이 아버지 제사 때 읽으면 어떻겠느냐고 제의해 왔다. 그래서 한 번 시도해 본 것이 몇 년 전이었다.

그런데 그 시도는 대 성공이었다. 그 자리에는 우리 형제뿐만이 아니라 고모들, 숙부, 숙모,어느 땐 아저씨 조카들까지 모였다. 대가족의 모인 곳이었기에 감동의 폭은 더 컸다. 그리고 동생들은 물론 다른 친척들까지 몰랐던 아버지의 새로운 면모를 알아내어 그리움이 새삼 더해갔고 관계가 깊은 형제들은 새삼 애틋함이 살아나는 듯 했다. 그 이후 제사를 주관했던 남동생은 나에게 주문을 하기 시작했다. 누나 내년에도 한 편 쓰세요. 그러다보니 나를 비롯하여 동생과 친척들이 기다리는 시간이 되었다. 물론 나에게는 부담이었지만 그것은 우리 집안의 기록일 뿐 아니라 긍지이며 남은 자손들이 나아갈 가르침을 받는 자리도 되어 사명감이 따랐다. 그 일은 큰 부담으로 다가왔지만 아버지에 대한 행복한 고민거리였다.

올 여름처럼 더운 해는 없었다. 8월 초순이 되자 말일에 있을 시아버님 기일이 또 무겁게 다가왔다. 이 더운 여름에 제사음식도 음식이려니와 식구들이 먹을 밥반찬을 뭐로 할까가 더 근심이 되었다. 친정에서 행해 왔던 이벤트를 우리 이씨 집안에서도 한 번 시도해 볼까 하는 마음이 슬며시 들었다. 그런데 시아버님에 대한 추억거리를 생각하면 너무 많은데 엮을 마음의 여유 뿐 아니라 시간이 촉박했다. 기일이 바짝 다가오자 학교 일과 맞물려 장 볼 일만 머리 속에서 오락가락 했다. 그렇다면 쉽게 편지를 써 본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목은 ‘돌아가신 아버님께’로 정했다. 그동안 돌아가신 햇수를 꼽으니 14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집안의 변화가 많았으니 드릴 말씀도 많다. 형님 댁은 두 며느리가 들어와 손자를 둘이나 보았고, 작년에는 나도 사위를 보았다. 시누이도 둘째 딸을 먼저 시집보냈다. 시아버님께 보고할 일이 세어보니 많다는 느낌이 들자 첫 구절이 생각났다.

‘아버님 가신 지도 14년이나 흘러갔습니다. 그때 아버님을 용인 산에 모셔놓고 우리들만 내려올 때 얼마나 애통했는지 몰랐는데 세월이란 약으로 이제는 그 슬픔도 살아져가고 있습니다’로 시작하여 형제 순으로 변화를 쓰기 시작하자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끝으로는 저는 어머님 모시고 잘 살아가겠습니다로 맺었다.

드디어 제사 날이 되었다. 남편이 그 편지를 제사 중간에 추모하는 기도 시간에 읽어 나갔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더 엄숙해지며 나도 시아버님에 대한 애틋함이 살아나는 것 같았다. 내가 쓴 편지를 읽는데도 마음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떤 기도보다 마음이 흡족해 지는 것 같았다. 나만이 아니라 모였던 형님 내외, 동생들도 다 한결같은 마음인 것 같았다. 아래 시누이는 언니, 눈물이 날 것 같아 혼났다고 나중에 토로해 왔다. 그렀다면 성공이다. 이번 제사는 처음 시도한 편지글이었는데도 흡족한 편이었다. 그러면 다음 제사 땐 시아버님에 대한 글을 정식으로 써서 읽어야 되겠다.

결과적으로 올 제사는 처음 시도한 편지글로 시아버님에 대한 또 다른 추모의 정을 나누었고 우애를 다진 셈이다. 돌아가는 형제들의 발걸음만큼도 배웅하는 우리 내외의 손길도 어느 때보다 가볍다.


Comments

skagway 2006.09.22 23:16
  한국에서는 며느리들이 명절에 가장 고되다는것 그쯤은 누구나 다 안다..그래 명절이 다가오면 모두 하는 이야기가..아이구..였다..그런데 미국서 살은지가 한 10년을 넘어가던즈음부터..문득 이런 문화가 그리워지기 시작하더라 아이들은 아버지의 생일날이 제일 이상하다하구..항상 시끄럽던날이 너무 조용해서. ..이제는 이런 자질구레한 모든것이 행복이었음을 ...아니 행복이라..생각..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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