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속에서/헤르만 헷세 (펌)
가을비가 회색 숲을 파헤치며 후드득 떨어지고 아침 바람속에 계곡은 차갑게 떨고 있다.
밤나무에서 무거운 열매가 떨어져 입을 쩍 벌려 촉촉한 갈색을 내보이며 웃는다.
내 삶에 가을이 몸부림치고 갈기갈기 찢긴 잎들을 바람이 휘몰아 간다.
나뭇가지는 모질게 흔들리고 나의 열매는 어디에 있는가?
난 사랑을 꽃피웠지만 그 열매는 고통이었다. 난 믿음을 일구었지만 그 열매는 증오였다.
나의 앙상한 마른 가지에 바람이 휘몰아 친다. 난 그것을 조롱하며 폭풍우를 이겨낸다.
열매란 내게 무엇인가.. 내게 희망은 무엇인가..! 난 꽃을 피워냈고 피워내는 것이 나의 희망이었다.
이제 난 시들어 가고 시들어 가는 것은 나의 희망일 뿐, 그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가슴속에 파묻어둔 희망은 순간적일 뿐. 내 안에 신이 살고 있고, 내 안에 신이 죽고 있다.
신은 내 가슴속에서 신음하고, 그것으로 내 희망은 충분하다.
옳은 길이든 그른 길이든, 꽃을 피워 냈든 열매를 맺었든 모두 다 하나일 뿐,
다만 그 이름에 불과하다. 아침 바람 속에 계곡은 차갑게 떨고 있고
밤나무에서 무거운 열매가 떨어져 투박하고 환하게 웃는다,
나도 함께 웃는다 굳어진 버릇으로 회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