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였던 당시 우리나라 교육사상 최초로 한국인 교장이 취임한 가운데 경선궁과 영친왕궁이 하사한 황해도, 전라남도, 경기도 등 3도와 신천, 은기, 완도 등 6군의 농경지 수익금을 재원으로 11세~26세의 여학생 5명을 선발하여 문을 연 우리 숙명의 창학은, 외국의 자본에 의존함 없이, 오직 우리 힘으로 일으킨 민족 여성 교육의 효시였다.
이로부터 32년 후, 2차 대전 발발 직전의 암울한 시절을 보내면서 구국과 애족을 염원하던 당시 지성인들은, 보다 높은 여성 교육의 필요성을 통감하게 되었고, 이것이 거국적인 '숙명여전 설립 모금 운동'으로 이어져 1938년 숙명여자 전문학교가 탄생되었다. 우리 대학교의 전신인 숙명여전은 황실이 제공한 막대한 재원과 교지 위에 역사적으로 유례가 없었던, 이러한 지식인 모금 운동에 힘입어 태어났으므로 그 설립 자체가 민족 지성사의 한 부분일만큼 감격적인 출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