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경자 화백

금수강산 0 4,052 2011.07.14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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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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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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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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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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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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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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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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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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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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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고가 흐르는 황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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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모사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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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개인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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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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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슬픈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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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의 통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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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다발을 안은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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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東京]여자미술전문학교를 다니면서 제22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조부상〉,

제23회에 〈노부〉를 출품했고 1944년 졸업했다. 8·15해방 후에는 전라남도 광주에서

교원 생활을 했다. 1955년 〈정 靜〉으로 대한미술원협회전에 출품하여 대통령상을

받았다. 1963년 도쿄 니시무라[西村]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고 1965년 도쿄 이토

[伊藤] 화랑에서 2번째 개인전을 가졌으며, 1969년 제10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출품했다.

1969년 유럽과 남태평양을, 1974년에는 아프리카와 유럽을 여행하여, 그곳에서 얻은 이국

풍물을 소재로 독특한 색감과 형태미의 그림을 그렸다. 1971년 서울특별시문화상, 1975년

3·1문화상을 받았다.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초대작가·심사위원을 지냈고 1954~73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를 역임했다. 근대 한국화에 있어 대표적인 여성화가의 한

사람으로 꽃이나 여인을 소재로 한 그림이 많으며, 시간을 초월하여 이국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며 의식과 감각의 지층을 탐색한 그림을 그렸다. 특히 1950년대에는 뱀을

주제로 하여 많은 그림을 그렸고, 1960년대에 들어서는 대상의 묘사를 넘어 생태적인 색채

감각의 순수조형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수필집으로 〈천경자 아프리카 기행화문집>

·〈한 恨〉 등이 있다.


천경자 씨는 동양화의 전통 기법을 따르면서도 장식성과 서정성을 강조했고 , 서양화 같은

채색화로 독자적인 화풍을 구축했다. 특히 해외 여행에서 그려온 여행풍물화는 참으로

이국적이었다.

작가조차도 ‘아프리카는 왠지 나와 인연이 있는 것처럼 느낀다’고 말했으니…. 그는 과작이지만

꾸준히 작업했고 이를 통해 ‘천경자적인’ 그림과 말이 관용어로 통용될 정도로 스타일을 확고히

하기에 이르렀다.
“내 온몸 구석구석엔 거부할 수 없는 숙명적인 여인의 한이 서려 있나 봐요. 아무리 발버둥쳐도

내 슬픈 전설의 이야기는 지워지지 않아요. 그저 태어날 때부터 팔자소관이라고 생각하고 말지만

그러다 보면 또 다른 허망한 고독감에 또다시 서글퍼지고 말아요.”(1980년) 그의 자의식이 얼마나

강했느냐면 열여덟 살 어린 나이에 본명 옥자 대신 경자를 쓰기 시작했으며 의대에 진학하라는

부친의 권고를 뿌리치고 미술 공부를 하기 위해 일본 유학을 떠날 정도였다. 1969년 남태평양에서

처음 시작했던 스케치 여행도 기본적으로는 방랑벽과 예술가적 기질이 있어서겠지만, 10대 시절의

유학 경험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생길 정도로 일본행은 고집스러웠다.
예술가적인 기질과 자존심이 유난히 강했던, 그래서 활동 기간에 비해 작품이 적은 천경자 씨는 몇

차례 큰 고난을 겪었다. 스물여덟 살 때 여동생이 폐결핵으로 사망했으며 당시로는 드물게 두 번

결혼했다. 그러나 가장 큰 시련은 말년에 찾아왔다. 자신의 작품 <미인도>가 위작 시비에 휘말렸던 것.

그는 위작이라고 주장하고 작품을 소장하고 있던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진품이라고 주장했는데, 감정

평가 결과 진품이라는 결과가 내려졌다. 이에 천경자 씨는 작가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세태에 울분하며

절필을 선언했다. 1991년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림이 작가의 생명인데…. 난 그림을 안 그리곤

살 수 없어요. 내가 붓을 꺾는다는 건 자살하는 행위와 똑같습니다”라고 말했던 그는 미국으로 떠난 뒤

돌아오지 않았다. 1998년 딱 한 번 온 적이 있지만 예정된 입국은 아니었다. 이때 천경자 씨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작품 중 일부를 제외한 93점과 저작 관리권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했다. 이후 그녀는

작품 활동을 하지 않았고 한국과의 연락도 뚝 끊었다. 그러다 2003년 봄 뇌출혈을 앓은 이후 건강을 회복

하지 못하고 있다. 뉴욕 병상에 누워 있는 그는 4년 만에 열리는 이 전시에 대해 뭐라고 생각할까.

아름답다고 생각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자료를 찾다 보니 이 전시회를 오래전에 예견했던 듯도 싶다.
“별나라에서 온 소녀를 그리고 싶어요. 별나라에서 왔으니까 모든 것이 새롭겠지요. 그런데 이 소녀가

얼마나 외롭겠어요. 하도 외로워서 어떤 한恨 같은 의식이나 감정을 갖게 되겠지요. 그러나 이 소녀는

얼마 후엔 지구에서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가 지니고 있는 가능성보다도 더 많은 가능성을 갖게 되겠지요.

그래서 고孤와 한恨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갖게 되겠지요.” 별나라에서 온

소녀를 그리고 싶다던 작가는 어느새 별나라 소녀가 되어 이야기를 한다. 말도 하지 못할 정도로 중병을

앓고 있는 작가가 다시 일어나 별나라 소녀를 그리는 일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만큼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그가 무척 그립다.

박경리 작가의 코멘트:

“화가 천경자는 / 가까이 갈 수도 없고 / 멀리할 수도 없다 // 매일 만나다시피 했던 / 명동 시절이나 /

이십 년 넘게 / 만나지 못하는 지금이나 / 거리는 멀어지지도 / 가까워지지도 않았다 // 대담한 의상 걸친

/ 그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 허기도 탐욕도 아닌 / 원색을 느낀다 / 어딘지 나른해 뵈지만 / 분명하지 않을

때는 없었고 // 그의 언어를 시적이라 한다면 / 속된 표현 / 아찔하게 감각적이다 // 마음만큼 행동하는

그는 / 들쑥날쑥 / 매끄러운 사람들 속에서 / 세월의 찬바람은 / 더욱 매웠을 것이다 // 꿈은 화폭에 있고 /

시름은 담배에 있고 / 용기 있는 자유주의자 / 정직한 생애 / 그러나 / 그는 좀 고약한 예술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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