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이 종무의 작품세계

금수강산 0 2,577 2012.08.26 00:19
자화상, 이종무 1958
화가 당림(棠林), 이종무(李種武)의 예술을 "황토의식에 집약된 미의 순례(巡禮)"라는 압축된 표현으로 평한 평자(評者)도 있다.(李慶成의 평문 제목)
이 화가의 예술을 검증함에 있어 "황토의식"이란 적절한 언급인지 꼭 집어 단언할 수는 없겠으나, 그러한 표현은 말하자면 일종의 "흙사랑"을 뜻하는 것이리라. 흙과 더불어 살아 온 농경민족의 후예로서 우리는 흙사랑의 전통이 날로 단절되어 가는 현실을 바라보아야 하는 오늘날과 같은 산업사회의 비정한 환경 가운데서 그의 예술은 환한 등불과도 같다.
남아있는 한 모서리의 논밭만치나 귀해 보인다.

당림의 예술은 실종되어 가는 고향의식 같은 것을 환기시키는 흙 고향의 정감을 담고 있다.
환금물결의 들녘과 청록의 산자락으로 이어지며 싱그러운 가을의 결실을 거두는 산하(山河)의 풍경이나 천고마비(天高馬肥)의 하늘이 선명하게 닿아온다. 대대로 농사를 으뜸으로 삼아오며 자연에 탐닉했던 민족적 정서가 작품의 근저에 깔려있다.
특히 근작에 이르러 화가의 작품세계는 사심 없는 노경(老境)의 관조로서 자연을 수용하며 그와 같은 겸허한 심상(心象)의 투영으로서 정일한 자연을 그리고 있다.

이 허심한 마음의 던짐이 실상 그의 작품의 기조(基調)를 이룬다.
결코 번잡하다고는 할 수 없는 가라앉은 톤으로서, 또한 지극히 부드럽고 서두르지 않는 붓질로서, 거기에 침잠된 중간색조의 색상이 가미된 화면은 화려하다기보다는 검소하며 현란하다기보다는 유현하다.
화면의 짜임새는 수평적이며 횡렬적(橫列的)인 편이다.
자연대상의 깊이, 즉 공기원근법적인 기법 따위를 배재함으로서 오히려 화면의 평면적인 전개가 돋보이는 것은 현대감각과 일치된다. 대상세계에 대한 현미경적이거나 묘사적인 접근으로 실체화(實體化)하려기 보다는 그것을 심상적으로 투사하여 화면형상으로 변조시키며, 잡다하게 늘어놓는 대신 절제적으로 응축시키며, 우리의 선인(先人)화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일종의 감필법(減筆法)같은 것을 충분히 활용하고 있다.

"예술은 자연의 순화(純化)"라는 명제에 적합한 작품세계인 것이다.
고착된 자연대상의 현상적 베김이 한 때 "자연주의" 내지는 "아카데미즘"이라는 명칭을 얻으며 특히 국전(國展) 등을 관류하는 큰 흐름으로 정착된 시절이 있었다.

이 고식적인 사실계열의 양식과는 진작 등을 돌린 화가의 작품세계는 또한 급격한 시류(時流)의 파고(波高)에도 크게 영합함이 없이 조용한 변신을 모색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화가 이종무의 작품에 있어서의 양식적 계열별 자리 매김은 구상(具象) 쪽에 넣어질테지만 한 때 화단의 쟁점이 되었던 그와 같은 분별의식이 이 화가의 작품에 적용되어서는 안되리라고 생각되어진다. 사실 그와 같은 양식적 재단(裁斷)이 불필요해진 시점이기도하다. 자연을 대상세계로 화면에 수용함에 있어서는 현장성이 중시되는 경우도 있다.
우리네 선인화가들은 그와 같은 방법대신에 자연의 대상이미지를 심의(心意)에 담아 화면형상으로 바꾸는 지혜를 일찍부터 터득하고 발전시켜 왔다.

예술이 기술(技術)과 연관되어 있음은 사실이나 그 정신적 가치를 더욱 고양시켰던 동양의 오랜 전통적 관점으로 보아 오로지 보여지는 자연에만 집착하는 방식에 또 집착할 필요가 있겠는가.
"예술은 자연의 순화"라는 개념적 해석에 따르더라도 자연대상은 어디까지나 소재의 원(源)이며 그 매재적(媒材的) 위치에 머물러 있어도 될 것이다.

자연 그 자체는 물론 인간과 상응하는 절대지존(絶對之尊)의 정신적 명제일테지만.
당림의 작품세계에 있어 그가 자연을 화면에 수용하는 방식은 다소 추상적이기도 하다.
이미 앞에서 언급되었듯이 수평적이고 평면적이다.

다양한 색면의 짜집기(모자?)인 듯 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통합색조를 유지한다.
색채구사에 있어 중간색의 혼합적 유연성이 특징적이며 결코 가시적인 자연의 물체 색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각기 작품 속에 나타나는 하늘의 빛깔이 얼마나 다채로운지를 보더라도 표현의 다양성을 알 수 있다.
자연의 객관적인 형태를 주관적으로 변이시켜 주관화함으로서 개별적인 표상성(表象性)의 표출을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의미에서 이 화가의 작품이 중용적(中庸的)이라는 특성을 간파하게 된다.

감성적이면서도 격렬한 격정의 울림 같은 것은 발견하기 힘들며 그렇다고 냉엄한 기하마적인 구조를 드러내는 것도 아니다.
침잠된 격조의 정일함이 전체 화면을 지배하는 가운데 전원시적인 서정성(抒情性 을 간직하고도 있다.
다시 말해서 무절제한 감성의 배설로서 화편을 온통 광기(狂氣)로 번득이게 하는 여의 화면과는 다르며, 다른 한편 짜임새에 치중하여 극단의 논리적 결속을 꾀하는 지적인 작품성향과도 궤(軌)를 달리한다.
화가의 인성 자체가 지극히 은둔적이며 조용하고 내심성적(內心性的)임은 잘 알려진 바이다.
그와 같은 작가적 성격의 발현으로서 그의 작품은 일관되게 평온을 유지해 왔고 어떠한 역설도 용납하지는 않았다.
작가의 심성의 회화적 변용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세계의 구심점(求心點)은 언제나 자연대상을 근간으로 한 구상적 서정공간의 창출로서 이미지를 구축해 왔다.

근작의 소재선택이 거의 풍경에 집중되고 있는 절은 화가의 연륜으로 보아 자연에 대한 관조적 탐미(眈美)의 폭이 더욱 넓고 깊어졌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화가 이종무를 포함한 그의 동세대는 이른바 "동경(東京) 유학생" 그룹의 마지막 세대가 될 듯 싶다.
서양화 도입기(導入期) 최초의 선두에 섰던 한 무리(一群)의 작가군은 거의 예외 없이 일본의 동경에서 수학과정을 거친 화가들로서 충당된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그 첫 1호를 장식한 화가가 춘곡(春谷) 고희동(高犧東)이었으나 그는 후에 동양화가로 전신했다.
당림의 화가로서의 입문이 공교롭게도 춘곡과의 만남에서 비롯되었으며 춘곡에게서의 사사(師事)와 동경유학이라는 수순을 거쳤음은 결코 우연으로만 간주할 수 없을 터이다.

해방 후 중요한 시기에 홍대(弘大)에 재직하며 전후 10여년간(55년 - 66년) 후진양성을 담당했던 기간,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를 비롯한 동료 선후배 화가들과의 교유로서 그의 예술적 안목은 더욱 넓어졌으리라.
당림의 초기작품은 5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비교적 자연대상의 묘사적 접근에 가까왔다. 누드나 착의(着衣) 인물, 도시 풍경이나 고궁일각(古宮一角)의 점경, 그리고 사계(四季)의 자연풍경의 변화를 화폭에 담던 시기이다.

1950년대 후반쯤에 서구에서 밀어닥치기 시작한 새로운 미술사조, 즉 추상표현주의의 양식적 흐름의 여파는 당림의 화면에까지 여진(餘震) 을 몰고 왔다. 일시나마 추상미술에 몰입했던 기간이다.
그러나 화가는 이때를 돌이켜 회고하여 그것은 한 시기의 외도(外道)였음을 실토한다.
화가의 본의(本意)는 어디까지나 자연의 실재적 원형에 근거를 두고 그것의 심상적 변주로 모아지는 구상양식에 있음을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당림의 근작 작품세계는 산의 연작을 통한 탐미적 자연의 접근에 있다.
옛 선인화가들이 산수(山水)를 선호하며 명승지를 찾아다니던 방랑벽이 어느새 이 화가에게도 전염되었다고나 할까.
그는 자신의 작품세계에 소재원(素材源)을 찾아 전국의 산하를 누비며 순례의 발길을 끊치 않는다.
작은 화폭에 담아온 풍경그림은 대형 캔버스에 옮겨지면서 작가의 감성과 밀착되어 별개의 세계를 재현시키고 있다.
자연과의 일치된 호흡, 그리고 자연을 통한 의식의 재충전은 이 원로화가에게 주어진 선물이며 자연의 섭리일 것이다.
자연과의 더 끈끈한 유대감을 가지기 위해 화가는 끊임없이 자연을 찾으며 자연과 대화한다.
그러는 가운데서 만들어진 작품은 그의 예술혼이 깃든 정신의 정화(精華)이며 진수(眞髓) 라고 할 것이다.

예술가에게 주어진 소임은 오로지 "예술창조"라는 소명의식을 가졌고, 또한 그 길만이 후진에게 물려줄 수 있는 유일한 유산임을 강조하는 노화가의 신념에 찬 눈빛이 그의 근황을 대변하고 있다. / 김인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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