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갱 Paul Gauguin

금수강산 0 2,854 2013.08.05 10:48
우리는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 고갱의 그림중에서~~
 
폴 고갱(1848~1903)의 그림 세계
이름 : 폴 고갱 (Paul Gauguin)
출생 : 1848년 6월 7일
출신지 : 프랑스
직업 : 화가
데뷔 : 1876년 풍경화비로플레숲의잔디살롱입선
대표작 : 타히티의여인들, 언제결혼하니, 자화상타히티기행
특이사항 : 대표적인 후기인상파 화가
 
고갱은 1848년 2월 혁명의 여파로 정치적 소요가 심했던 시절 파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남미로 이주해 페루의 리마에서 4년 간 머물렀다. 이 시절의 이국생활이 후일 남태평양의 섬에 대한 동경심을 키운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1865년 하급선원이 되어 대서양 항로를 오가는 무역선에서 일했고, 몇 년 후 파리 소재 금융회사인 베르탕 상사에서 근무했다.
 
1873년 거리에서 알게 된 덴마크 여인 소피와 결혼해 다섯 아이를 얻으며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살아가는 듯 했다. 그러나 고갱의 마음 한 구석에는 언제부터인가 '회화의 악마'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27~28세 때부터 인상파 작품을 수집하며 일요일마다 본격적으로 회화연구소에 다녔다. 1876년 살롱에 처음으로 출품하여 피사로, 세잔 등 인상파 화가들과 사귀게 되었다. 특히 피사로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본격적인 화가가 되기로 결심해 1883년 증권거래소 직업을 포기했다. 그러자 곧 생활이 어려워져 부인과 자식들은 고갱을 떠나 코펜하겐으로 가버렸다.
 
1886년 6월에는 생활고에 지친 나머지 남불 퐁타방 지역으로 이사한 뒤 종래 인상파 풍의 외광 묘사기법을 탈피해 자신만의 명확한 선과 특이한 색조로 구성되는 장식적 화법을 추구했다. 같은 해 11월 파리로 다시 돌아와 고호와 로트렉 등을 알게 되었다. 특히 고호와 깊이 사귀게 되어 1887년 남대서양의 마르티니크 섬을 다녀온 뒤 아를 지방에서 잠깐 같이 살게 되었다. 하지만 화풍과 기질상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차이점들이 속속 발견되어 심각한 갈등을 겪다 고호의 귀 절단 사건을 계기로 마침내 갈라서고 말았다.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고 문명세계에 대한 혐오감만 더해져 마침내 1891년 남태평양의 타히티 섬으로 떠났다. 유럽의 문명세계에서 멀리 떨어진 그곳에서 현지인들과의 교유를 통해 원시적 삶의 역동성을 만끽하며 서구 미술사를 크게 바꾸어 놓을 뛰어난 명작들을 차례차례 만들어 내었다. <해변의 타히티 여인들>, <이아 오라나 마리아>, <언제 결혼하려나>, <아레아레아> 등이 바로 그것들이었다. 그럼에도 타이티에서의 현실적 생활은 여전히 빈곤과 고독, 그리고 병마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원주민의 건강한 인간성과 열대의 밝고 강렬한 색채에 매료되지 않았더라면 이러한 시련 속에서 인생 후반부에 만개한 그의 예술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다.
 
고갱은 인상주의에 접하며 회화세계에 입문했지만 인상주의가 추구했던 시각적 효과보다 꿈과 상징, 그리고 내면성에 더 비중을 둔 표현을 선호했다. 이를 위해 점묘적 기법보다 널찍하게 분할된 원색 화면과 평면적 구성으로 대상의 장식성을 부각시켰다. 이러한 회화정신은 문명과 관습에서 무한히 자유로운 원시주의로 흘렀고, 드디어 타히티의 원시림 속에서 강렬한 색채와 건강한 인간의 내면에서 뿜어 내어지는 근원적인 역동성을 발견하여 완성시킬 수 있었다
 
 
 


Les Alyscamps,
Arles
1888
Oil on canvas
35 7/8 x 28 3/8 in. (91 x 72 cm)
Musee
d"Orsay, Paris

섬머셋 모음이 쓴 달과 6팬스
1919년에 발표되었다. 프랑스 후기인상파 화가 P.고갱의 생애에서 힌트를 얻어 쓴 소설로, 장편작가로서 명성을 굳힌 작품이다.

주인공 스트릭랜드는 런던의 평범한 주식중개인으로 처자가 있는 40대 남자이다. 이 남자가 돌연 무엇엔가 홀린 듯 처자를 버리고 파리에 나가 화가가 된다. 그는 그에게 호의를 보이는 선량한 친구의 부인과 정을 통하여 그 일가를 파멸하게 한다. 마지막에는
타히티섬으로 이주하여 나병에 걸려 고통의 나날을 보내며 강렬한 그림을 그리다가 이 섬에서 죽는다.

이 소설의 제목에서 ‘달’은 때로 광기()와 예술의 극치를 뜻하고, ‘6펜스’는 재산과 세속적인 명성을 갈망하는 감정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다.




Blue
Trees
1888
Oil on canvas
92 x 73 cm (36 1/4 x 28 3/4 in)
The
Ordrupgaard Collection, Copenhagen





Still Life with Profile
of Laval
1886
Oil on canvas
46 x 38 cm (18 1/8 x 15 in)
Josefowitz
Collection





We Hail Thee
Mary
1891
Oil on canvas
44 3/4 x 34 1/2 in. (113.7 x 87.7
cm)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고갱
마리아를 경배하며
1891년, 캔버스
유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화면 왼쪽 아래 쓰여진 라는 말이 그대로 그림의 제명이 되었는데
그것은 타히티섬의
마오리족의 말로
<아름다운 마리아>라는 수태고지를 알리는
천사의 부름소리라고 한다.
실제로 화면에는 안쪽에 있는
꽃나무 그늘에
천사의 모습이 보인다.
고갱은 종교적인 테마로서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타히티인들의 생활모습을 표현하려한
것이다




Contes
barbares
1902
Oil on canvas
130 x 89 cm
Museum Folkwang,
Essen




Riders on the
Beach
1902
Oil on canvas
73 x 92 cm (28 1/2 x 35 7/8 in)
Private
collection



The White
Horse
1898
Oil on canvas
140 x 91 cm (55 1/8 x 35 7/8 in)
Musee
d"Orsay, Paris



Paysanes Paysannes
bretonnes
(Breton peasant women)
1894
Oil on canvas
26 x 36 1/4 in.
(66 x 92 cm)
Musee d"Orsay, Paris



There is the
Marae
1892
Oil on canvas
26 3/4 x 35 3/4 in. (68 x 91
cm)
Philadelphia Museum of Art



Spirit of the Dead
Watching
1892
Oil on burlap mounted on canvas
28 1/2 x 36 3/8 in. (72.4
x 92.4 cm)
Albright-Knox Art Gallery, Buffalo, NY

고갱이 타히티에서 그린 최대 명작중
하나이다.
이 작품은 고갱이 타히티에 도학한 후 성취한 모든 이론과
실제를 보여주는 현란한 이력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림의 소재는 고객의 체험에 의한 것이다.
어느 날 여행에서 돌아와 새벽에 방문을 열었을 때
본 광경을 그림으로 구상화한
것이다.
" 테후라는 침대에 배를 깔고 나체로 누워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공포에 질려 눈을 부릅뜨고 있었지만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한동안 나도 불안했었다.
테후라의 공포가 나한테도 전해진 것이다.
그녀의 눈은 유황빛을 내쏟듯 빛나고 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그녀를 나는 처음 보았다.
어둠속에서 위험한 유령과 불타는 욕망에 접해있던 이 소녀가
혹시나 두려워할까봐
나는 움직이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그 순간 그녀가 나를 어떻게 생각 했는지를 알고 싶었다.
아마도 곤혹스러운 얼굴로 보아 나를
귀신이나
그녀의 동족들을 잠못이루게 괴롭히는 투파커응?해골쯤으로
알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Matamoe
1892
Oil
on fine canvas
115 x 86 cm (45 1/4 x 33 7/8 in)
Pushkin State Museum of
Fine Arts, Moscow


Market
Day
1892
Oil on canvas
28 3/4 x 36 1/8 in. (73 x 91.5
cm)
Kunstmuseum, Basel



Aha oe feii?
(What!
Are You Jealous?)
1892
Oil on coarse canvas
68 x 92 cm (26 1/2 x 35 7/8
in)
Pushkin State Museum of Fine Arts,
Moscow



Femmes de Tahiti or Sur
la plage
(Tahitian Women or On the Beach)
1891
Oil on canvas
27 1/8
x 35 7/8 in. (69 x 91 cm)
Musee d"Orsay,
Paris



Faaturuma
1891
Oil
on canvas
94.6 x 68.6 cm (36 7/8 x 26 3/4 in)
The Nelson-Atkins Museum of
Art, Kansas City



Be
Mysterious
1890
Lime wood and polychrome
73 x 95 x 0.5 cm (29 x 37 1/2
x 1/16 in)
Musee d"Orsay, Paris



M. Loulou
1890
Oil
on canvas
21 5/8 x 18 1/8 in. (55 x 46.2 cm)
Barnes Foundation, Merion,
PA



The Yellow Christ (Le
Christ jaune)
1889
Oil on canvas
36 1/4 x 28 7/8 in. (92.1 x 73.4
cm)
Albright-Knox Art Gallery, Buffalo,
NY



Les
Miserables
1888
Oil on canvas
Rijksmuseum Vincent van Gogh,
Amsterdam



Seascape with Cow on the
Edge of a Cliff
1888
Oil on canvas
73 x 60 cm (28 3/4 x 23 5/8
in)
Musee des Arts Decoratifs,
Paris


Breton Girls Dancing,
Pont-Aven
1888
Oil on canvas
71.4 x 92.8 cm (28 1/8 x 36 1/2
in)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The Swineherd,
Brittany
1888
Oil on canvas
29 x 36 1/2 in. (74 x 93 cm)
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


Still Life with Three
Puppies
1888
Oil on canvas
34 3/4 x 24 5/8 in. (88 x 62.5 cm)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The Vision After the
Sermon
(Jacob Wrestling with the Angel)
1888
Oil on canvas
73 x 92
cm (28 3/4 x 36 1/4 in)
National Galleries of Scotland, Edinburgh
 
 
첨부이미지
이아 오라나 마리아(1891)
 
이 그림을 처음 대했을 때 받는 인상은 색채의 화려함과 풍성함, 그리고 다채로운 충실감일 것이다. 오른 쪽 앞에 아이를 어깨에 태운 채 비스듬히 선 여인, 그 옆쪽에 두 손을 모으고 경배를 드리려는 듯 한 몸짓을 보이는 두 여인은 물론이고, 주위 풍경인 바나나 배경의 수목, 꽃, 잎사귀, 나무 사이의 오두막에 대한 각각의 명확한 형태와 강렬한 색채가 바로 그 인상을 구성하는 대상의 내용들이다. 어느 한 구석도 과감한 생략 없이 색채와 형태로 메워진 것이 인상파인 모네나 피사로의 그림들과 구별되는 고갱의 회화 세계이다. 다시 말해 고갱은 공간보다는 이국적인 장식성을 추구함으로서 입체감이 있는 광대한 공간을 화면에 붙잡으려 하지 않고 2차원의 화면 그 자체에 그 어떤 틈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쓴다는 것이다.
 
이 그림의 의미 내용에 대해서는 화면 왼쪽 구석에 고갱이 써넣은 그림의 제목인 <IA ORANA MARIA>의 글귀가 단서처럼 여겨진다. 이것은 "마리아여, 우리는 당신에게 예배를 드립니다"라는 타이티 말로 기독교의 '아베마리아'에 해당하는 뜻이라 한다. 그렇다면 고갱은 타히티섬의 정경을 그리면서 서구의 기독교적 의미를 넣은 셈이다. 요컨대 분명히 의도적으로 타히티인 마리아와 예수를 그리려 한 것이다. 어머니와 아이의 머리 위에 걸려 있는 원광이나 두 타이티 여자의 경배 모습이 영락없는 실증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그림은 얼핏 이국 풍물 정경을 그린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기독교적 도상화를 바탕으로 한 타히티 버전의 성상 종교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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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타히티 여인들(1891)
 
고갱은 타히티에서 나른한 여인들의 자태와 우수 어린 시선 등에 매료되었다. 그는 이 그림에서 해변가에 앉아 있는 두 여인을 아주 가까운 근경에서 묘사했는데 대담한 구도와 색채가 돋보인다. 반면 화면이 전면의 여인들이 앉아 있는 공간과 뒷 배경을 구획짓는 수평띠에 의해 강조됨으로서 그 깊이감은 약화되는데 이는 앞서 언급한대로 고갱이 의도한 바이다. 왼쪽 여인의 옆 얼굴과 앞으로 내민 오른 팔, 오른쪽 여인의 뭉툭한 발바닥과 툭 불거져 나온 무릎 선이 이루어내는 시각적인 조응은 화가의 치밀한 장식적 조형의식을 반영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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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결혼하려나(1891)
 
타히티의 원주민 처녀 두명이 순진무구한 시선으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 앞의 처녀는 뒤의 처녀와 달리 조신한 포즈를 잡으려 해도 자신의 내면에 들어있는 활기찬 에너지를 더 이상 감출 수 없다는 듯 동적인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강렬한 원색으로 이글거리는 원시적 생명력을 가감없이 표출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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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레아레아(1892)
 
이 그림의 중앙에 그려진 땅은 따뜻한 색상으로 채워지고 있는데 실재하는 것이 아닌 상상의 공간이다. 있는 그대로 대상을 재현하려 하지 않고 선과 색의 배열 사이에 있는 그 어떤 신비감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왼쪽 위에 부드럽운 색상으로 채색한 신상은 달의 여신을 나타낸 것이고, 중앙의 인물이 연주하는 피리는 타히티의 밤에서 고갱이 느낀 고요함을 표현한 것이다. 왼쪽의 불그스름한 털 빛의 개는 그 어떤 악의 이미지로 대비시키기 위해 고갱이 집어 넣은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마치 티치아노나 조르조네와 같은 르네상스의 거장들이 이원적 대치를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자주 등장시켰던 화면적 공식을 타히티의 무대에서 한번 실험해 보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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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이 지켜 본다(1892)
 
이 그림에 나타난 모델은 고갱이 타히티에 와서 얼마지 않아 동거하게 된 현지인 처녀 테후라이다.
 고갱은 그녀의 모습을 통해 마오리족 사이에 살아 있는 당당한 원시적 생명력을 구현하려 한다.
이목구비가 크고 갈색 피부가 윤기 있는 마오리족 남녀는 이교의 신상을 연상시키는 모델로서 고갱에게 아주 매혹적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정복자 코르테스의 현지처 말린체처럼 이국적 에로티시즘을 자극하는 테후라 임에야 더 말할 것도 없다. 이 처녀는 화가의 주요 작품에 단골 모델로서 자주 등장한다.
 
여기에서 흥미있는 것은 인물의 배치와 구성은 마네의 <올랭피아>를 패러디한 듯해 고갱이 겨냥한 의도를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그것은 마네의 <올랭피아>에서처럼 테후라의 도발성이 사람들에게 먹혀 들어가 그들의 뇌리에서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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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1893~94)
 
1895년 파리생활을 청산하고 타히티로 떠나기 1년 전에 그린 그림으로
자신의 마지막 자화상이다. 앞서 제작한 다른 2점의 자화상에 비해
 훨씬 어두운 색조로 그려져 이 당시 고갱의 힘겨웠던 생할 환경을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황색의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자신의 그림을 배경 속에 집어넣고 있다. 그 그림은 1892년에 그린 <마니오 투파파우>로 거울에 비친 모습으로 그려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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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날(1894)
 
이 그림은 고갱이 1894년 일시 파리로 귀환해 그린 작품이지만
 단순하고 명쾌한 색채 구사가 완전히 타이티풍으로 정착했음을 확인시켜 준다.
 브루타뉴 시절 고갱이 추구하던 종교적 체험을 화폭에 담는 제작 모티브는
여기서도 실행되고 있으나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등에서 추구하던
성서적 주제는 이제 토속신의 이미지로 대치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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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없을 타히티여 Never More, O Tahiti(1894)
 
고갱은 원시부족 신화와 이국적인 여체를 통해서 서양미술에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염원을 끝까지 밀고 간다.
 
 물론 긍극적으로는 서구 문화를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내심을 보유한 채...
그러나 타이티 생활이 시간과 함께 정착되어감에 따라
자신의 이곳 생활에 대한 자부심을 점점 자주 표출한다.
 
 병마로 인한 죽음의 시간이 가까와 올수록 "나는 고상한 미개인이다.
 문명은 첫 눈에 그것을 알아챌 것이다.
 나의 그림에는 이런 서구적 관념을 초월하는 회화정신이 배어있다.
 결코 그 누구도 이를 모방하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하며
자신의 만년 타히티에서의 생활에 자부심과 애정을 드러내었고,
그 심정이 이 그림을 통해 구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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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Gauguin : Van Gogh Painting Sunflowers(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 1888. Oil on canvas. Rijksmuseum Vincent van Goug, Amsterdam, the Netherlands.
 
1888년 10월 고갱은 아를에서 빈센트 반 고흐와 동거생활을 시작한다.
 성격도 다르고 그림에 대한 생각도 달랐던 두 사람의 만남은 한동안은 평화로왔으나,
 12월 23일 고갱이 고흐를 떠나고 크리스마스 이브에 고흐가 자신의 왼쪽 귀를 면도칼로 자르면서 비극적으로 끝을 맺는다.
 
두 사람 사이의 이야기는 후세 사람들의 입에 끊임없이 오르내리게 되고
고흐가 귀를 자른 진짜 이유에 대한 해석도 분분하다.
 진실이 무엇인지는 고갱과 고흐 두 사람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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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돌포가 얼음처럼
 


폴 고갱 (Paul Gauguin)
(1848~1903)
인물사진
폴 고갱(Paul Gauguin) 서양화가, 역사인물
출생-사망
1848년 6월 7일 (프랑스) - 1903년 5월 8일
데뷔
1876년 풍경화 비로플레 숲의 잔디 살롱 입선
경력
1900 말벌 편집장
1889 카페 보르피니 전람회
1885 제8회 인상파전 출품
1881 제6회 인상파전 출품
관련정보
네이버<세계인물> - 프랑스의 후기인상파 화가 / 폴 고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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