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 : 명량해전 명소 울돌목 !!!

숙명사랑1 1 2,680 2014.08.20 03:04

충무공 이순신: 명량해전 명소 울돌목 !!!

 

 

 

진도 울돌목 동영상-[이순신 장군 명량해전 명소]

 

 

"약무호남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명량대첩지 어룩비)

 

만약 호남이 없으면 국가가 없다.

임진왜란시 이순신 장군이

서남해 제해권과 호남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이순신 장군의 해전에서의 연전연승은 임진왜란 발발 후

파죽지세로 한양을 향해 진격하던 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왜군의 육로병진 전략을 막음으로써 7년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서남해의 제해권으로 호남의 곡창을 보호하여 군량미를

확보할 수 있었고, 육로보다는 효과적인 기동력을 확보할수

있는 수로를 통한 진격을 막고 후방을 공격함으로써

의병이 봉기하고, 조ㆍ명 연합군이 반격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이순신 장군의 23전 23승중에서

명량해전만큼 극적인 경우가 없었다.

 1597년 7월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칠천량에서 왜 수군에 대패하여 거의 

 궤멸상태에 이르렀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해전을 금하고

육전에 주력하도록 명할 정도로 위용을 떨치던 조선 수군의

전함은 칠천량 해전에서 거의 파괴되고 살아남은 수군은

뿔뿔히 흩어졌다.

이후 제해권을 장악한 왜군은 여세를

몰아 서해바다를 통해 한양으로 진격하고자 했다.  

 

 

파직 끝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의 직책을 받은 이순신

장군이 수습한 세력은 전선 12척과 군사 120여명이었다.

 

 

조정은 이순신 장군에게 수군재건의 교지를 내렸지만 잔존

수군세력으로는 왜 수군을 감당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해상에서 버틸 수 없으면 육상으로 올라와 육전을

도와도 좋다는 명을 내렸다. 
이에 이순신 장군은 조정에 올린 장계에서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있는 힘을 다해 싸우면 오히려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여 해전을 포기하지 않았다. 

남은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서쪽으로 진을 옮겨 해남 어란진,

진도 벽파진에서 진을 치다가 서해로 진격하는 왜 수군을

울돌목에서 맞아 일전을 치르게 된다.

벽파진에서 진을 치고 있었으나, 조류가 빠른 울돌목을

등지고 싸우는 것보다 울돌목에서 상대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으로 명랑해전 하루 전에 진영을

우수영으로 옮기게 된다. 

1597년 9월 16일 아침 7시경 왜군은 전함 300여척을

이끌고 해남에서 목포방향으로 흐르는 북서조류를 타고

울돌목을 향해 오고 있었다.

10배가 넘는 왜군 전선에 겁을 먹고 동요하는 군사들에게

‘죽고자 하면 살 것이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라고 하며 선두에서 독전하였다.

절대적인 열세 속에서 시작된 전투는 조선 수군이

고군분투한 끝에 조류가 목포에서 해남쪽 남동류로

바뀌면서 왜군 진영으로 빠른 물살이 흐르는

것을 이용하여 왜선 31척을 격파하였다. 

승산이 전혀 없어 보이는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지휘관이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는 살신성인의 솔선수범의

자세와 지형지물을 이용하는 탁월한 지략, 죽기로 싸우면

이길 수 있다는 임전무퇴의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올해로 명량해전에서 승리한 지 412주년이 된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수군이

명량해전에서 왜 수군의 서진을 막지 못하고 호남의 바다를

왜군에게 내주었다면 조선의 운명은 그때 벌써

다했을지 모른다.  
400여넌이 지난 오늘에도 울돌목은 이순신 장군과 조선

수군의 그날의 함성을 묻고 거친 물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다.

 

이순신이 통제사(統制使)에서 물러난 뒤 원균(元均)은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어 일본 수군과 대전했으나

 다대포(多大浦)·칠천곡(漆川谷)에서 대패하여 해상권을 상실하였다.

원균의 패전으로 같은 해 백의종군(白衣從軍) 중인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기용하였다.

 

 이때 이순신은 패전 후 남은 13척의 전선과 수군을 정비하여 닥쳐올전투에 대비하였다.

왜군에게 대패하여 얼마남지 않은 조선수군의 전력을 우려하자

당시 이순신은 선조에게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함이 남아있습니다."라고

비장한 각오의 장계를 올렸다.

8월 왜선 8척이 해남의 어란포(於蘭浦)에 출현하자 이를 격퇴하고,진(陣)을 진도(珍島) 벽파진(碧波津)으로 옮겼다.

9월 7일에는 서쪽으로 이동하던 왜선 55척 중 호위 적선 13척이 어란포에나타나자, 한밤중에 이순신이 선두에서 지휘하여 적선을 격퇴시켰다.

다시 적의 함대가 어란포에 들어온다는 보고를 받고

9월 15일에 벽파진에서 우수영(右水營)으로 진을 옮긴 뒤 장병들에게

“必死則生, 必生則死(필사즉생 필생즉사)”라고 말하고

필승의 신념으로 적의 내습을 기다리고 있었다.

9월 16일 왜선 133척이 어란포를 떠나 명량으로 공격해오자,

13척의 전선과 군사를 정비하여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道總]와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가지휘하는 왜선 31척을 무찔렀다.

이 싸움으로 조선은 다시 해상권을 회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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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사랑1 2014.08.20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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