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olden Fish
클레는 매우 독창적인 회화 언어로 사물의 본질적이고 정신적인 의미를 전하려고 한 천재적인 추상화가로, 독자적으로 활동했지만 미술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작품들은 공상적인 상형문자와 자유로운 선묘로 말미암아 때때로 아동 미술을 연상하게 한다
Red and White Domes
1898년 중학교를 졸업하자 오직 회화에 전념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파리 대신 뮌헨에서 미술을 공부하기로 결정하고 바이에른의 수도에 있는 예비미술학교에 다녔다. 1900년 뮌헨 아카데미에 들어가 우의화들로 유명한 아카데미 화가인 프란츠 폰 슈투크 밑에서 공부했다. 슈투크는 정확한 해부학적 지식을 강요했으며 회화보다는 소묘에 전념하도록 했다. 클레는 스승에게 순응하기를 거부하며 1901년 아카데미를 떠났다. 그는 잡지 〈유겐트 Jugend〉와 풍자신문인 〈짐플리치시무스 Simplicissimus〉 등 독일의 전위적인 간행물들에 열광하면서 여기에 영향을 받아 미술적·지적 관습주의와 결별했다. 그는 미술을 공부하는 동안에도 꾸준히 음악회에 다녔으며, 특히 독일 낭만주의 작곡가인 리하르트 바그너와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그리고 모차르트의 작품들에 매혹되었다. 1899~1900년 사이의 겨울 어느 음악회에서 뮌헨의 저명한 의사의 딸인 릴리 슈툼프와 알게 되었고 1906년 그녀와 결혼했다. 1901년 6월 클레는 뮌헨을 떠나 잠깐 베른으로 돌아갔다가, 훗날 20세기초 스위스의 유명한 조각가가 된 그의 친구이자 화가인 헤르만 할러와 함께 이탈리아로 떠났다. 밀라노·제노바·로마·나폴리·폼페이를 여행하면서 클레는 특히 미켈란젤로와 보티첼리·틴토레토·핀투리키오 등 이탈리아 르네상스 대가들의 작품에 매료되었다
Remembrance of a Garden
Sourthern Gardens
베른으로 돌아와서 예전에 만든 15점의 에칭 판화를 모아 뮌헨 신분리파 전람회의 심사원단에게 제출했다. 그 가운데 〈나무 위의 처녀 Jungfrau im Baum〉·〈날개 달린 영웅 Der Held mit dem Flügel〉 등의 10점이 그 전시회에 채택되었다. 이 에칭들에서 클레는 공격적이고 환상적인 형상들을 통해 거의 위협적인 유머를 보여준다. 그는 이러한 풍자와 세부까지 꼼꼼하게 그린 기괴한 형상을 통하여 베른의 단조롭고 답답한 분위기에서 벗어났는데, 그 대표적인 작품이 에칭 판화인 〈서로 상대방이 더 높은 지위에 있다고 믿는 두 사람의 만남 Zwei Männer, einander in höherer Stellung vermutend, begegnen sich〉이었다. 클레는 상상력뿐만 아니라 실물을 기초로 드로잉·수채화·유리그림도 그렸으며, 점토로 몇 점의 작은 조상을 만들었다. 클레는 1906년 결혼한 뒤 1920년 가을 바우하우스에 교수로 초빙되기 전까지 미술가들이 모여 사는 뮌헨의 슈바빙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1907년 11월 30일 아들 펠릭스가 태어났다. 피아니스트인 릴리가 음악을 가르쳐 식구들을 부양했으며, 클레는 1914년까지 그림을 팔지 않았다. 풍족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는 베른에서보다 더 자유롭고 편안함을 느꼈다. 왜냐하면 그는 신선한 당대의 미술에서 자극을 받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보다 폭넓고 다양한 전시회와 음악회들을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Dream City
독일의 주요한 수집가인 빌헬름 우데는 1912년 4월 파리에서 16일 동안 達ジ8庸?프랑스에서 활동하던 주요한 입체파 화가들에게 클레를 소개했다. 클레는 특히 오르피즘의 창시자인 로베르 들로네의 다채로운 작품들에서 영향을 받았고, 또한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에서도 감명을 받았다. 고흐의 선구적인 표현주의 작품들에서 클레는 큰 충격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작품들의 강렬한 표현 이면에 있는 '별의 연소 때문에 괴로워하는 영혼'을 느꼈기 때문이다. 19세기 후반 벨기에의 또 다른 선구적인 표현주의 미술가인 제임스 앙소르의 판화들도 이 무렵 그의 관심을 끌었다. 클레는 북부 유럽의 표현주의 미술에 강하게 끌렸지만 폴 세잔을 가장 높이 평가했으며, 동시대의 화가들 중에서는 20세기 프랑스의 뛰어난 화가인 앙리 마티스에게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1914년 4월 클레는 어린 시절 친구인 루이 무아예 및 청기사파 동료 화가인 아우구스트 마케와 함께 튀니지로 여행을 떠났다. 이들은 제각기 이 북아프리카의 여행 경험에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클레는 튀니지의 케라반에서 수채화를 그리면서 색채의 성질을 깨닫고, 일기에 이렇게 썼다. "색채가 나를 지배하고 있다…… 그것은 항상 나를 지배할 것이다…… 지금 행복한 시간을 누리는 것은 바로 색채와 내가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겨우 12일 동안 튀니지를 여행했지만, 이 여행은 그의 미술을 자연 그대로의 현상에 대한 묘사로부터 추상 경향의 미술로 바꾸어놓았으며,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억을 기초로 한 추상 미술"로 변화시켰다.
Highway and Byways
1914년 8월 1일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클레의 친구이자 동료 화가인 아우구스트 마케는 9월 26일 프랑스의 샹파뉴 전선에서 죽었다. 독일 표현주의를 개척한 또다른 친구인 프란츠 마르크는 1916년 3월 4일 베르됭에서 전사했다. 마르크가 죽은 지 며칠 후 징집되어 독일군에 들어간 클레는 뮌헨 근처의 여러 곳에 배치되었는데, 그중 슐라이스하임의 비행장에서는 비행기들을 닦고 칠하는 일을 했다. 군대 생활이 그에게 큰 두려움이나 방해가 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에게 군대 생활은 그런대로 견딜 만한 것이었으며, 그 속에서 그는 '공상적인 꿈'을 꾸었다. 그의 상사들은 그의 명성을 존중했으며, 그래서 그가 민가에 살면서 가족을 방문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는 또한 상사의 허락하에 프란츠 마르크의 작품 전시회를 위한 서문을 쓰기도 했다. 여가 시간에는 수채화를 그리거나 스케치를 하거나 책을 읽었다. 독일이 전쟁에서 패배한 뒤 그는 제대하여 뮌헨의 슐뢰스헨 수레스네스에 작업실을 빌렸다. 베른의 부유한 수집가인 헤르만 루프는 그의 수채화를 몇 점 샀으며 파리의 미술상이자 입체파의 지지자인 칸바일러에게도 몇 점 건네주었다.
Ad Parnassum
1919년부터 그는 주로 유화를 그리기 시작했으며 점점 색을 두텁게 칠했다. 그는 외부 세계의 색조를 모방하지 않고 내면의 변화에 조응하여 색을 창조했다. 독일의 건축가인 발터 그로피우스가 '건축이란 미학적 현상이 아니라 생물학적 현상이다'라는 원칙에 따라 설립한 디자인 학교인 바우하우스는 1920년 11월 클레를 회화 교수로 초청했다. 클레는 그 초청을 받아들여 이듬해 1월 뮌헨을 떠나 바이마르로 갔다. 바우하우스의 일반적인 교육 방식은 미술의 기술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미술의 이상은 '미술을 위한 미술'이 아니라 실용적인 미술, 즉 장식 사업이나 기념 사업에 쓰여지도록 주입된 기술이었다. 바우하우스의 이상대로라면 '새로운 건축물이…… 수많은 손을 거쳐' 창조될 수 있을 것이다. 그토록 내면적이고 시적인 개성을 지닌 클레가 어떻게 이러한 집단적 분위기에 끼어들 수 있었는지 의아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는 광학에 대한 철저한 지식과 독특한 교육자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클레는 스스로 터득해 〈교육적인 스케치북 Pädagogisches Skizzenbuch〉(1925)에서 상세히 기술한 방식에 따라 회화를 가르쳤다.
Ad Parnassum (detail)
1924년 여름 클레는 시칠리아에서 6주일을 보냈는데, 그 섬의 타오르미나에서는 수채화를 그렸으며 시라쿠자에서는 그곳 풍경에 감탄하여 그 자체가 '추상 풍경'이라고 느꼈다. 바우하우스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언론과 여론으로부터 잇따른 공격을 받고 1925년 문을 닫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독일의 극작가인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의 격려에 힘입어 학교를 데사우로 옮겨 1926년 그로피우스가 지은 건물에서 다시 문을 열었다. 7월에 클레의 가족은 데사우로 이사했는데 이웃에는 칸딘스키가 살았다. 클레는 자신의 작업실에서 수업도 하고 음악회도 열었으며 강연도 하고 잡지 〈바우하우스 Bauhaus〉를 공동으로 펴내기도 했다. 1928년 12월 20일 클레는 제노바에서 배를 타고 이집트로 갔다. 그는 며칠 동안 카이로·룩소르·아스완을 방문했는데, 이 여행도 예전의 튀니지 여행과 마찬가지로 그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클레는 1931년 바우하우스의 교수직을 사임하고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의 교수직을 받아들였다. 그는 작품을 팔아 충분히 생활할 수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가르칠 필요가 없었지만 천성적으로 가르치기를 좋아했다
1933년 1월 아돌프 히틀러가 총리에 임명되자 독일에서의 클레의 생활은 불행해졌다. 클레는 나치의 비판을 받아 미개하고 타락한 외국인으로 취급되었다. 그는 독일을 떠나 이탈리아·스위스·프랑스를 여행했다. 클레는 히틀러 정권을 극도로 혐오해 정치적으로 중립인 스위스로 다시 돌아가 1933년 베른에 정착했다. 1934년 클레는 처음으로 런던에서 전시회를 가졌으며, 베른과 바젤에서는 1935년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다. 그해 여름 홍역을 수반한 기관지염에 걸려 폐병과 심장병의 합병증이 일어났다
The Mask with the Little Flag, 1925, watercolor on paper mounted on cardboard, Staatsgalerie, Munich
그의 병은 점막을 마르게 하여 심장까지 파고드는 희귀한 병인 공피증(鞏皮症)으로 진단되었다. 이 사실에 대해 클레는 처음에는 태연했다. 그는 활동을 계속하면서 타라스프에서 치료를 받다가 건강을 되찾기 위하여 스위스의 발레 주에 있는 몽타나쉬르시에르로 갔다. 그러나 건강을 회복하려는 그의 희망은 점점 사라져갔다. 1937년 그는 열정을 다해 그림을 그렸으며 짧은 산책을 제외하고는 쉬지 않고 작품에 매달렸다. 그당시의 그림에서는 파스텔화인 〈정원 속의 인물 Figur im Garten〉에서 밝고 강렬한 색채를 보였다
17 Astray, 1923, watercolor and India ink on paper mounted on cardboard, Kunstmuseum Öffentliche Kunstsammlung, Basel
그해에 뮌헨에서 퇴폐미술전이 열렸다. 이 전시회에서는 나치가 타락한 미술로 비난하며 압수한 현대 미술의 많은 걸작들이 전시되었는데, 그중 클레의 작품도 17점이 들어 있었다. 1939년 클레의 60회 생일을 맞이해 그는 독일의 공식 관청을 제외한 세계 각지로부터 축전과 선물을 받았다. 1940년초 클레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비극적인 길에 접어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내가 그린 수많은 소묘들이 이미 그 길을 가리켜왔으며 '이제 때가 되었노라'고 한다."
Legend of the Nile
클레는 그해에 일련의 천사들을 그렸는데, 그것들은 그리스도교보다는 이슬람의 천사들에 더 가깝다. 그는 또한 〈죽음과 불 Tod und Feuer〉을 그렸는데, 그의 '진혼곡'(Dies Irae)이라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다가오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듯하다. 5월 10일 오르셀리나-로카르노의 요양소에서 앓아누운 그는 무랄토로카르노의 성아그네스 병원에 입원한 지 몇 주 후 심장마비로 죽었다. 7월 1일 루가노에서 화장되珦만? 유골은 1942년 9월 베른의 쇼스할덴 공동묘지에 묻혔다. 묘비에는 그의 일기에서 따온 다음과 같은 구절이 새겨져 있다. "이 지상에서 나는 전혀 이해될 수 없는 인간이다. 왜냐하면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존재들에게서만큼이나 죽은 자들에게서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Park of Idols
Insula Dulcamara
- P. Courthion 글
Embrace
Captive
Rising Sun
Once Emerged from the Gray of Night, 1918, watercolor on paper mounted on cardboard, Kunstmuseum, Bern
Station L 112, watercolor and India ink on paper mounted on cardboard, Kunstmuseum, Be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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