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곤 쉴레 Egon Schiele

금수강산 1 2,691 2014.10.23 03:19

에곤 쉴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감옥에 간 이야기와 사랑이야기를 빼고 가면 섭섭할 것입니다.

“이곳은 얼마나 추악한가……. 그림자가 드리워진 빈은 온통 잿빛이고, 일상은 기계적으로 반복될 뿐이다.

한시라도 빨리 이 도시를 떠나고 싶다. 이곳은 얼마나 불쾌하고 고약한지! 온통 나를 질시하고 나에 대해서 모의하고 있다. 이전에는 동료였던 사람들이 이제는 악의에 찬 시선을 던진다. 빈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져있다. 도시는 암흑이고 썩어 들어가고 있다. 나는 혼자이고 싶다. 보헤미아의 숲으로 가고 싶다. 오월, 유월, 칠월, 팔월, 새로운 것들을 보아야 하고, 새로운 것들을 탐구해야 한다. 검은 물을 맛보고, 뒤틀린 나무들을 보고 싶고. 사나운 바람을 느끼고 싶다. 경이로운 시선으로 이끼 낀 정원의 담장을 바라보고 싶다. 이 모든 것들을 체험하고. 어린 자작나무들의 재잘거림과 잎들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고 빛과 태양을 바라보고 축축하고 푸르스름한 저녁의 계곡을 즐기고, 황금빛 물고기의 반짝임을 느끼고, 하늘에 차곡차곡 쌓인 하얀 구름들을 바라보며 꽃들과 얘기하고 싶다.”

" 에곤 쉴레의 편지 중에서, 1910 "

1911년, 조용히 작품제작에 몰두할 곳을 찾던 쉴레는 어머니의 고향으로 갔습니다. 쉴레의 모친의 고향은 당시에는 크라마우라고 불렸고 지금은 체스키 크롬로프(Český Krumlov)라고 하는 도시로 체코 남부 보헤미아 지방에 흐르는 블타바 강(체코어 Vltava, 독일어 몰다우 Moldau)인근에 있는 도시였습니다. 당시 쉴레 어머니의 친척들이 크라마우에 살고 있어서 쉴레 어머니도 자주 머물렀다고 합니다.

크라마우에서 실레는 연인 발리 노이첼(Valerie Neuzil 발레리 노이칠, 애칭 : 발리 Wally)과 함께 살며 동네도 돌아다니고 마을 풍경을 화폭에 옮겼습니다. 그런데 ‘에곤 쉴레’란 화가에 대해 소문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여자관계가 문란하다, 그림이 상스럽다는 소문이 돌면서 에곤 쉴레는 이 도시 사람들에게 쫓겨나다시피 다른 곳으로 옮겨야했습니다.

Houses on the Moldau, Krumau, 1910 Gouache, watercolor and black crayon on paper Private Collection

Autumn Trees 1911 Oil on canvas, 79.5 x 80 cm Private collection

Summer Landscape, Krumau, 1917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Edge of Town (Krumau Town Crescent III), 1918 Oil on canvas Maue Galerie am Landesmuseum Joanneum, Graz

Street in Krumau. c. 1917 Black chalk and gouache on paper, Private collection

The Small City II(Die kleine Stadt II, Ansicht von Krumau an der Moldau) 1912-13 Oil on canvas 89.5 x 90.5cm Private Collection, Vienna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도시가 지금은 상당히 유명한 곳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체코에서 프라하 성 다음으로 큰 고성이 있어 구시가지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두 번째로 에곤 실레 아트 센트룸(Egon Schiele Art Centrum)이 있어 전시회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쉴레가 태어난 곳도 아니고 어머니의 고향에 잠시 머문 곳이고 쫓겨난 곳인데 지금은 그곳에서 정기적으로 전시회가 열리고 관람객을 유치한다니 좀 씁쓸합니다.

결정적인 사건은 다음에 발생합니다.

1912년이면 에곤 쉴레는 이미 빈(Wien), 뮌헨, 쾰른, 부다페스트 등에서 전시회나 전시회 참여로 명성을 달리던 시절입니다. 스물두 살의 화가로 그런 성장을 보였으니 천재 화가로 유명할 법도 합니다. 크라마우의 아픔이 있었지만 도시를 떠나 있고 싶었던 에곤 쉴레는 빈(Wien)에서 3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노이렌바흐(Neulengbach)라는 소도시로 다시 이주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스튜디오를 만들고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도시에서 온 젊은 화가는 곧 명사가 되었고 특히 10대 아이들이 많이 놀러 왔나 봅니다. 아마 에곤 쉴레의 작품을 보시면 알겠지만 소문을 들은 아이들이 놀러오지는 않고는 넘어갈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중에 한 아이의 아버지가 퇴역장교였던 모양입니다. 그 퇴역장교가 에곤 쉴레를 열네 살짜리 딸을 유혹하고 유괴했다는 혐의와 아이들에게 외설스러운 그림을 보여주었다는 혐의로 고발했습니다. 고발을 접수한 경찰들이 쉴레를 체포하기 위해 그의 스튜디오로 왔을 때에 100점이 넘는 작품이 있었는데 그들은 그 작품들은 ‘포르노그라피’라고 생각했습니다. 종합해보면 에곤 쉴레는 소녀들을 어린 소녀들을 유혹하고 유괴해서 외설적인 그림들을 그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Schiele's Room in Neulengbach 1911 oil on panel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Austria

Two Little Girls, 1911 Pencil and watercolor on paper Graphische Sammlung Albertina, Vienna

Standing Female Nude in Black Stockings, 1912 Watercolor and pencil on paper, 48.5 x 21.5 cm Private collection

쉴레는 재판을 받게 되었고 유괴와 관련한 죄목은 인정되지 않았지만 에로틱한 그림들을 아이들이 볼 수 있는 장소에 두어 아이들의 정서에 악영향을 주었다는 이유로 3일간 감금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죄를 지은 그림 한 점을 재판정에서 불태우기도 했습니다. 재판과정에서 21일간의 구금과 3일간의 감금형, 작품의 화형이 그가 받은 처벌이었습니다.

"나는 내가 에로틱한 스케치나 수채화를 그렸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술 작품이다. 나는 그 사실을 입증할 수 있으며, 그 작품들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기꺼이 내 견해를 지지해 줄 것이다.

다른 예술가들은 에로틱한 그림을 그린 사실이 전혀 없다고 말할 것인가. 예컨대 롭스 같은 사람은 전적으로 포르노 그림만 그렸다.

그러나 예술가를 감옥에 가두는 경우는 결코 없었다. 아무리 에로틱한 작품도 그것이 예술적인 가치를 지니는 이상 외설은 아니다. 그것은 외설적인 감상자들에 의해 비로소 외설이 된다. 클림트를 포함하여 지극히 많은 대가들의 이름을 예로 들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식으로 변명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에로틱한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단,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내가 그와 같은 그림을 고의로 아이들에게 보여 주었다는 것, 내가 아이들을 타락시켰다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진실이 아니다! 물론 타락한 아이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타락이라는 말은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어른들은 그들이 아직 어린아이였을 때 얼마나 타락해 있었는지, 얼마나 성적 충동에 시달렸는지를 잊어버린 것일까.

어른들은 자신들이 아직 어렸을 때 공포스러운 욕정이 급습하여 괴로웠던 기억을 잊어버린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잊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그로 인하여 정말 무섭고 괴로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성에 대한 감각을 잃지 않는 한, 성에 대한 번민으로 괴로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에곤쉴레 "옥중일기"

이 사건으로 쉴레가 화가로서의 명성에 타격을 받거나 활동에 지장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오스트리아 사회가 워낙 퇴폐적이라 외설 그림이나 사진이 만연했기에 큰 문제가 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쉴레 자신에게는 충격이 있었나 봅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자신의 그림을 불태운 경험이 되살아났을 것입니다. 스스로 예술의 순교자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변한 점이 있다면 어린 소녀들보다는 성숙한 여인들을 그렸다는 것입니다.

Agony(고뇌) 1912 Oil on canvas 70 x 80 cm Neue Pinakothek, Munich

1912년의 이 그림을 어떤 책들을 보면 "예수의 고뇌"라고 번역해놓기도 했습니다. 에곤 쉴레는 이 그림 속의 예수의 모습에서 자신을 찾으려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Conversion, 1912 Oil on canvas Private Collection

Conversion은 이행이나 전환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법률적으로 “점유침탈”이란 용어이기도합니다.

Fighter 1913 Gouache and pencil on paper 48.8 x 32.2 cm Private collection

Self Portrait as St. Sebastian (poster) 1914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Austria 아르노 화랑 전시회의 포스터입니다. 날아오는 활과 지친 표정이 현대인의 마음과 에곤 쉴레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것 같습니다.

에곤 쉴레가 감옥에 있을 때 그를 위해 가장 동분서주한 여인이 ‘발리 노이칠’입니다. 두 사람의 처음 만난 것은 에곤 쉴레의 스승인 클림트의 화실에서 클림트의 소개로 만났다고 합니다. 에곤 쉴레보다 네 살 아래인 열일곱살의 발리는 원래 클림트의 모델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말이 많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클림트는 평생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모델들과 모두 잤다는 소문이 돌던 화가라, 그런 화가가 제자에게 자신의 모델을 하던 여자를 소개해주었으니 주변에서는 자신의 여자를 제자에게 ‘넘겼다’라는 말이 나올 만 했습니다.

발리는 에곤 쉴레의 모델이 되었고 거기다 같이 살기도 했습니다. 여러 이야기를 들어보면 발리는 헌신적인 여인이었다고 합니다. 쉴레의 많은 그림의 선정적인 포즈를 취하는 모델을 하면서고 온갖 집안일을 다 했고 거기다 잔심부름까지 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쉴레의 선정적인 그림을 고객에게 배달하는 일도 했는데 그녀와 클림트와 쉴레에 관한 이야기나 그 그림의 모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그녀를 성희롱을 하기도 했고 눈물바람을 하면서도 쉴레의 곁을 지켜주었습니다. 쉴레가 감옥에 있을 때는 날마다 그를 면회하고 그림도구를 챙겨다 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1914년 쉴레는 그들의 이웃에 살던 부유한 퇴역 철도 공무원의 딸인 ‘에디트 하름스’라는 여성을 알게 되었습니다. 안정적인 생활을 추구하던 쉴레는 에디트와 결혼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에곤 쉴레는 발리와 관계를 아는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서 인지 1915년 2월 친구이자 후원자인 뢰슬러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결혼을 할 작정이야. 모험적이지만... 아마도 발레리는 아닐 걸세."이란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쉴레의 태도를 놓고 그를 이중적이거나 속물적인 근성을 가진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 에곤 쉴레가 실제 여자문제가 복잡한 사람은 아니었다고는 하지만 수년간 자신을 위해 헌신적으로 살아온 여성을 쫓아내고 여성의 배경을 봐가며 결혼할 사람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거기다 4년간 동거해온 발리에게 새로운 연인 에디트 하름스(Edith Harms)에게 보내는 연애편지 배달까지 시켰다는 것은 지탄받을 만한 일입니다.

Portrait of a Woman 1912 Gouacne and pencil on paper 24.8 x 24.8 cm Private collection

Portrait of Valerie Neuzil 1912 oil on panel Private collection

Wally with red blouse lying on her back, 1913, pencil, water color, 31.5cm x 49cm, private collection

Death and the Maiden(Der Tod und die Frau) 1915/16 Oil on canvas 150 x 180 cm Oesterreichische Galerie, Vienna

이 그림은 에곤 쉴레와 발리의 이별을 그린 작품이라고 합니다. 남자를 잃지 않기 위해 손깍지를 낀채 남자에게 매달린 여성이 불안하고 안쓰럽습니다. 에곤 쉴레는 발리에게 매년 에디트없이 휴가를 보내자고 제안을 했지만 발리는 단호히 거절하고 다시는 쉴레를 만나지 않았습니다. 쉴레에게 배신당한 발리는 1차 세계전쟁에 간호사로 종군하였으나, 1917년 야전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에디티는 곱게 자란 순진한 처녀였으나 강단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편지글을 보면 발리와 관계를 정리할 것을 요구하고 있고 부모가 에곤 쉴레와의 만남을 반대하였지만 난관을 뚫고 결혼을 성사시켰습니다. 드디어 1915년 6월 17일 결혼식을 올렸는데, 이 날은 쉴레 부모의 결혼기념일이라고 합니다.

Portrait of Edith Schiele in a Striped Dress 1915 oil on canvas Haags Gemeentemuseum, Netherlands

Seated Couple(also known as Egon and Edith Schiele) 1915 Gouache and pencil on paper 52.5 x 41.2 cm Graphische Sammlung Albertina, Vienna, Austria

Embrace (Lovers II) 1917 Oil on canvas 100 x 170.2 cm Osterreichische Galerie, Vienna

쉴레의 작품 중 유명한 작품 중의 하나로 "포옹" 혹은 "연인들"로 불립니다. 쉴레의 다른 그림과는 달리 전라의 남녀가 서로 안고 있으나 상반신만 밀착되어있고 다리는 살짝 닿아있습니다. 근육질의 남자와 여인의 포즈가 생동감을 주고 꽉 찬 구성도 감상자를 끌어당깁니다.

Mother and Two Children 1917 Oil on canvas 150 x 158.7 cm Oesterreichische Galerie, Vienna

Portrait of the Artist's Wife 1917

Portrait of the Artist's Wife Seated, Holding Her Right Leg 1917 Pierpont Morgan Library, USA

Portrait of the Artist's Wife, Seated 1918 Oil on canvas 139.5 x 109.2 cm Osterreichische Galerie, Vienna

그런데 이 시기는 이미 유럽은 제 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있었습니다. 물론 에곤 쉴레도 이 전쟁에서 그의 조국 오스트리아의 징집을 받았습니다. 결혼한 지 사흘 만에 징집영장이 나왔습니다. 에디트 하름스와 에곤 쉴레는 전쟁터로 가지 않기 위해 노력을 했고, 첫 발령지는 체코 프라하에서 러시아 포로들을 감시하는 일이었습니다. 그곳에서 가정생활도 계속할 수 있었고 창고의 일부를 개조하여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917년에는 빈(Wien)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결혼 후 에곤 쉴레는 상당히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시기에 그려진 에디트 하름스의 인물화들은 이전 작품들에서 보이던 강렬하고 신경질적인 붓터치가 아니라 부드럽고 온화한 형태의 것들입니다.

Forty-Ninth Secession Exhibition Poster, 1918 Color lithograph Private Collection

1918년 빈에서 개최된 오스트리아 화가 연합(Vereiningung Bildender Kunstler Osterreichs) 빈 시세션의 49번째 전시회 포스터

쉴레는 이 전시회의 포스터를 담당했고, 50점이나 되는 작품을 전시했고 자리도 중앙의 좋은 위치였습니다. 전시회는 성공적이었고 많은 초상화를 주문받았습니다. 클림트 이후 오스트리아 화단을 이끌어 갈 주요인사로 부각되었습니다.

The Family 1918 Oil on canvas 152.5 x 162.5 cm Oesterreichische Galerie, Vienna

이 그림은 쉴레 부부의 소망이었을 것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1918년은 에곤 쉴레에게 슬픈 해였습니다. 그에게 하나도 아니고 세 가지 슬픈 사건이 발생합니다. 첫 번째는 그의 스승이자 우상이었던 클림트가 급성 폐렴으로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그런데 더 큰 슬픔은 가을에 찾아 왔습니다. 1918년 가을에는 전 세계를 휩쓸던 스페인 독감이 빈까지 날아왔고 임신 6개월이던 에디트 하름스가 10월 28일에 스페인 독감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부인의 죽음을 그림으로 남기려던 에곤 쉴레도 존경하던 스승 클림트의 초상화를 완성하지 못하고 3일 뒤인 10월 31일 스물여덟이라는 나이로 아내를 따라가게 된 것입니다.

에곤 쉴레에 대한 평가는 그때나 지금이나 극과 극을 달립니다. 자위행위를 하는 자화상이나 여동생 게르티를 모델로 그린 누드 작품을 보면서 그를 정신병자 취급하기도 했는가 하면 인간 내면에 잠재된 본능의 세계를 그려낸 재능을 가진 뛰어난 화가라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생활면에서도 언제나 말쑥한 차림을 하고 다니며 돈을 써대며 생활고를 호소하였다거나 결혼 과정을 보며 속물이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천재적 재능을 가진 그가 너무 일직 세상을 떠난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내게 예술이 없었다면 지금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생을 사랑한다. 모든 생명의 깊이에 침잠하는 것을 사랑한다.

그러나 나를 원수 다루듯 사슬로 묶어 나 자신의 것이 아닌 삶으로,

즉 하찮은 가치밖에는 지니지 않고 그저 실리적일 뿐인,

예술이 결여돼 있고 신이 부재하는 삶으로

나를 몰아넣고자 하는 강제를 혐오한다…….

나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의 심층으로 가라앉기를 원한다.”

"1912년 4윌 27일 옥중에서"

그는 죽는 순간도 사진으로 남겼습니다.

에곤 쉴레 부부의 묘비입니다. 부인의 임신한 상태를 그대로 묘사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숙연하게 합니다.

다음은 뢰슬러에 의해 전해지는 그의 유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제, 아마도,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들을 떠나야 합니다. 떠난다는 것, 죽는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며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살아가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지요. 나는 살면서 많은 사람들을 괴롭혔습니다. 내가 죽고 나면 곧, 아니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틀림없이 나의 예술을 찬양하고 존경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내 그림을 극도로 조롱하고, 비난하고, 모욕하고, 방해하고, 오해하게 될까요? 언제까지나 나에 대한 오해는 남겠지요.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찬사나 오해 그런 것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뢰슬러에 의해 전해지는 에곤 쉴레의 유언"

더 관심이 있는 분들은 프랭크 화이트포드의 『에곤 쉴레』(시공아트)나 박덕흠님의 저서 『에곤 쉴레-에로티시즘과 선 그리고 비틀림의 미학』을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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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금수강산 2014.10.23 04:04
<font color=green size=2><b>비앤나 Belvedere 궁의 미술관에서 클림트 관의 다음 방에는<br>
클림트의 제자인 에곤 쉴레의 인물화와 풍경화를 만났다<br>
그의 그림은 예전에는  비 호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로 눈앞에서 원화를 감상하면서<br>
28세에 요절한  화가의 천재성에 경외감을 가지게 되었다<br>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두명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 와 에곤 쉴레의 그림을 감상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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