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은 “동서양을 잇는 중계자역할을 한 음악가(서울대 음대 김정길 교수)”라는 평가를 받은 선구자다. 그는 한국악기의 연주법을 서양악기에 접목하려는 시도를 많이 했는데, 가야금과 거문고의 현을 뜯는 주법을 바이올린 연주기법으로 채택하는가 하면 플루트주자에게 대금의 떨림을 재현하도록 요구했다. 서양연주자들에게 그의 작품은 연주자를 극한으로 몰고 가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가 작곡한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은 쇤베르크의 12음계 기법에 한국의 정악색채를 담은 주요음 기법을 사용한 첫 작품이다. 당시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이 곡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며 단체로 병원 진단서를 끊어오는 파업을 벌였을 정도다. 그러나 1959년 다름슈타트에서 초연됐을 때 청중들은 음악에 큰 감명을 받고 열렬한 갈채를 보냈으며, 동양에서 온 작곡가는 3번이나 다시 무대에 불려나갔다. 동양음악과 서양악기의 만남이 가져온 힘이었다.
그로부터 50년 뒤 2009년 베를린 필하모니홀 무대에 한국에서 온 한 바이올리니스트가 섰다. 가녀린 어깨에 올려진 바이올린이 구슬픈 아리랑 선율을 토해내자 청중들의 숨이 멈췄다. 느릿느릿 때로는 구슬프게, 때로는 장중하게 다가오는 가락에 몸을 맡긴 청중들은 “아리랑이 이토록 아름다운 음악인지 몰랐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환상적인 공연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우리대학 관현악과의 유시연 교수. 무대는 그녀의 8번째 테마콘서트인 ‘Folk Tune’의 베를린 필하모니 초연이었다.
유시연 교수는 선구자다. 한국 전통가락의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해 전공인 바이올린 대신 해금을 잡고 어려운 클래식 음악을 대중의 눈높이에 맞게 소개하려고 최초로 테마가 있는 콘서트 형식의 연주회를 도입했다. 보수적인 클래식 음악계에서 이같은 행보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이유가 있다. 음악의 본질은 함께 즐기는 것에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유 교수는 “예전엔 치열하게 독주를 했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함께 하는 것에 더 큰 기쁨을 느낀다”고 고백한다. 같이 즐기는 음악, 대중과 호흡하는 클래식이라는 화두를 이끌고 있는 유 교수를 만나 그녀의 음악철학과 숙명여대 교수로서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바이올린을 닮은 소녀, 세계로 나가다
유 교수가 바이올린을 배우게 된 것은 운명과도 같았다. 성악을 전공한 어머니의 영향으로 일찌감치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그녀는 어느 날 동생의 바이올린 강사로부터 이런 말을 듣는다. “넌 참 바이올린을 닮았구나. 한번 해보지 않겠니?”
마침 양손으로 건반 치는 것에 애를 먹던 그녀다. 강사의 말에 혹한 유 교수는 그날부터 바이올린을 잡기 시작했고, 거침없이 성장을 거듭했다. 한국일보, 이화경향 등 국내 유수의 콩쿨에서 우승하고 17세에는 동아일보 콩쿨에서 1위로 입상한 뒤 서울시장이 수여하는 ‘청소년 음악가상’을 수상했다.
선화예고를 졸업한 유 교수는 서울대 음대에 진학한다. 그러나 그녀의 눈은 일찌감치 해외를 향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항상 노트에 적어가며 키웠던 꿈, 바로 커티스 음악원 입학이 목표였기 때문이다. 전교생 170명이 전액 장학생이고 악기 별로 1년에 1~2명만 뽑는 곳이다. 아무리 소싯적부터 천재라고 칭송받은 그녀라도 결코 쉽지 않은 도전이었지만 멋지게 합격하게 된다.
주빈메타와 레너드 번스타인이 가르치는 학교, 그곳에 가면 자신의 세상이 새롭게 열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유 교수는 당시를 회상하며 “뭐랄까, 마치 연예인들과 함께 학교를 다닌다는 느낌이었어요. 책에서만 보던 우상들이 사사하고 수업을 듣는 친구들도 유명인사들이었거든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부풀었던 꿈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쟁쟁한 영재들 사이에서 섬과 같은 고립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전 세계의 실력자들이 모두 모인 곳이니 한국에서 콩쿨 1등을 도맡던 저도 여기선 꼴찌였어요. 그때 땅바닥까지 떨어진 자존감은 말로 표현 못하죠” 유 교수는 그럴수록 더욱 바이올린 줄을 팽팽히 당겼다. 남보다 더 노력해야한다는 부담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몸에 탈이 나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팔의 힘줄에 염증이 생긴 것. 그녀는 결국 중도에 귀국할 수 밖에 없었다. “한국에서 병원을 6개월 다니고 나머지 6개월은 그냥 쉬었어요. 부상이 완치되는데 무려 7년이나 걸렸죠.”
커티스 음대에서의 치열한 생활이 끝난 뒤 유 교수는 우연한 기회를 통해 영국왕립대학에 진학한다. 클래식의 본고장인 유럽으로 간 것이다. 그녀의 표현에 따르자면 커티스에서의 생활은 마치 물 속에 잠영한 채 앞만 보고 헤엄치는 기분이었다면 이곳에서는 비로소 물 밖으로 나와 바다를 바라보게 된 기분이었다. 테크닉, 기교를 배우는 단계를 지나 음색과 톤의 아름다움을 찾고 유럽인들의 사고방식이나 매너, 문화를 흡수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음악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언젠가는 한번쯤 유럽에 꼭 가봤으면 좋겠어요. 한국이나 미국과는 다른 새로운 시각을 배울 수 있거든요. 음악은 결국 생활을 표현하는 수단인데, 유럽인들은 음악을 생활의 일부분으로 여기고 즐기며 살더라고요.”
이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간 유 교수는 예일대에서 석사, 뉴욕주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특히 이곳에서 배운 아카데믹한 음악 공부와 학구적 지식들은 이후 그녀가 테마콘서트를 열게 된 원동력이 되었다. 유 교수는 “되돌아보면 미리 계획하지는 않았지만 눈앞에 놓인 문을 열다보니 적재적소에 필요한 교육을 받아온 것 같다”며 “어렸을 때부터 미리 한 가지 진로만 정하기보다 자기 앞에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다보면 길이 열릴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얘기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숙명여대 교수가 되다
흔히 음대 교수는 신이 점지해준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특정 악기의 교수 자리는 몇 년에 한 번씩 가뭄에 콩 나듯 나는 반면 전국의 날고 기는 실력자들이 대부분 지원하기 때문이다. 유 교수는 그런 경쟁을 뚫고 2000년 숙대 음대 교수가 됐다. 채용 당시 에피소드 얘기에 그녀는 손사레를 친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정말 아찔한 실수를 여럿 저질렀죠. 음대가 학생회관 건물에 있을 때였어요. 오디션을 보러 갔는데 무대 입구를 찾지 못해서 관객석을 통과해 가는 사고를 치는가 하면, 면접에서는 음대 시설이 어떠냐는 질문에 방음도 안 되고 환경이 너무 열악한 거 같다고 돌직구를 날렸죠. 오랜 시간 외국에 체류하다보니 이쪽 사정을 전혀 모르고 철이 없던 것 같아요”
앞날이 창창한 바이올리니스트는 왜 대학교수가 되려고 했을까. “초등학교 때 통지서 장래희망에 ‘연주를 하는 대학교수’라고 썼어요. 당시만 해도 교수가 연주까지 하는 경우는 드물었는데 스승이신 김남윤 교수님을 존경하는 마음에 그렇게 쓴 것 같아요.” 연주수입이 보잘 것 없어 전문 연주자로서만 살기 힘든 우리나라의 공연예술 풍토도 그녀의 결정에 한몫을 했다.
클래식의 대중화, 테마콘서트로 시작하다
유시연 교수하면 테마콘서트를 빼놓을 수 없다. 2002년 처음 시작한 이래 매년 주제를 바꾸며 이어져와 이제는 그녀만의 브랜드가 됐다. “그 당시에는 테마를 붙인 독주회가 없었어요. 대부분 본인이 그동안 갈고 닦은 기량을 보여주는 발표회 형식이죠. 연주의 주체가 연주자이다보니 관객들은 클래식을 어렵고 지루하게 여기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그래서 그들을 위한 음악회,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클래식을 소개하는 음악회, 잘 모르는 감춰진 보석같은 곡들을 소개하는 테마콘서트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클래식의 대중화’를 위해 시작한 테마콘서트는 첫 회 피아졸라의 탱고를 시작으로 최초의 음악인 종교음악, 민속음악, 궁정음악, 바로크시대나 에펠탑이 세워질 무렵의 프랑스 음악 등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확장된다. 그 외연이 넓어진 만큼 유 교수가 들인 품 또한 많아졌다. 8번째 테마콘서트인 Folk Tunes는 무려 7년의 기획을 거쳐 완성됐다. 그녀의 아리랑은 바이올린으로 전통민요의 뉘앙스를 살리기 위해 수년간 직접 해금을 배운 노력의 결과다.
“전통예술대학원의 강은일 선생님을 모시고 2년간 매주 토요일 3시간씩 한번도 빠지지 않고 수업을 들었어요. 처음엔 겨우 오선지에 그려진 도라지를 보고 연주했는데 나중엔 정간보에 쓰인 송구여지곡 등 정악도 연주할 정도가 됐죠.” 배우면 배울수록 자신이 생겼다. 동양 음악의 옅고 짙은 농담을 서양식으로도 표현할 수 있을 듯 했다. 바이올린으로 아리랑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직접 원하는 스타일의 국악 연주 음반을 찾아 채보하고 악보를 만들었다.
이렇게 완성된 아리랑은 유 교수에게 단순히 우리의 전통가락 그 이상이다. 우리 민족의 얼과 한이 서린 세계최고의 민속음악이다. “각 나라의 민속음악들은 각자가 가진 에너지가 많아요. 오랜 세월 민족의 아픔을 위로해준 곡들이니까요. 그런데 그중에서도 아리랑은 함축된 에너지가 으뜸입니다. 내공이 완벽하게 꽉 차 있어서 그 이상 가는 음악을 찾을 수가 없더라고요. 바로 제가 Folk Tune에서 아리랑을 피날레 곡으로 연주한 이유에요.”
제자들의 잠재력 찾아주는 스승 되고파
유 교수는 음악하는 사람들이 “순진하고 우직하다”고 말한다. 힘든 연습을 반복해야 하는데 꾀를 부릴 요량이면 애초에 시작도 안하니까 나온 말이다. 그녀 역시 자신에게 엄격한 기준을 적용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어떻게 가르칠까?
“음악 교육은 전세계 모든 학교에서 1:1 레슨 형태로 가르쳐요. 다 똑같죠. 왜냐, 교수가 학생에게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연주특성에 맞춰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살릴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에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단, 저는 학생들에게 꼭 연주가, 솔로이스트가 되라고 강요하고 싶지 않아요. 각자의 꿈이 있고 진로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굳이 성공가능성이 희박한 길만을 보여주기 싫거든요. 학생들의 재능을 파악해 그 능력을 개발할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해주는 게 교수의 역할이라고 보고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실제로 유 교수의 제자 중에는 연주가 뿐만 아니라 재단이나 정부 산하 기관의 공무원, 교육자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이들이 많다. 스승의 지도에 따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 행복하게 사는 법을 찾은 학생들이다. 그래서일까. 유 교수의 수업은 항상 학생들에게 인기만점이다. 매 학기 강의평가마다 수위를 다툰다. 지난 학기에 진행한 현악 앙상블 수업은 만점을 받기도 했다. 스승의 날에 제자들이 애기를 데리고 오면 같이 효창공원으로 나들이를 간다. 딸들이 딸들을 낳고, 그렇게 사제 간의 정이 깊어진다.
올해 유시연 교수는 연구년을 맞이했다. 매년 이어오던 테마콘서트도 이번엔 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요즘 눈코뜰새 없이 바쁘다. 올해 예정된 연주회만 총 13번, 그중 60%가 챔버뮤직(실내악)이다. 오는 4월 열리는 경기실내악축제와 서울스프링페스티벌에서는 피어스 레인, 강동석, 김상진, 조영창 등과 함께 무대에 선다. “만약 연구년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아찔해요. 원래는 여행으로 과로한 심신을 달래려고 했는데 모두 취소하고 하루종일 고3 수험생처럼 스터디 중입니다.”
마치 영업비밀 캐묻듯 내년에 재개할 테마콘서트의 테마도 살짝 물어봤다. “scent of jazz라는 주제로 재즈의 향기에 취할 수 있는 콘서트를 만들어보려고 해요. 정말 재미있을 것 같지 않으세요?” 이런, 유시연의 재즈콘서트라니. 벌써 심장이 두근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