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so, a Korean translation is below.
Young Woo Kang, international disability rights pioneer,died of cancer on Thursday, February 23, at the age of 68.
Kang, who lost his eyesight at theage of 14, was the first blind Korean to earn a Ph.D., and in 2002, he wasnominated by President George W. Bush to serve on the National Council onDisability, an independent federal agency that makes recommendations to thePresident and to Congress on issues affecting the 54 million Americans withdisabilities. The U.S. Senate twiceconfirmed his nomination, and for six years, Kang worked on issues ranging fromthe inclusion of people with disabilities in emergency planning to culturaldifferences and attitudes in empowering people with disabilities.
His journey from a blind teenagerto Presidential appointee was a remarkable one.
Kang was born in South Korea in 1944, and his father passedaway when he was 13 years old. Thefollowing year, Kang suffered a retinal detachment in a sports accident. At the time, discrimination against thehandicapped – and the blind in particular – was widespread. It was a common superstition that seeing ablind person would bring bad luck, and the only occupations available to a blindperson were as a fortune teller or masseuse.
In 1960, after several unsuccessful surgeries, it wasconfirmed that Kang would never regain his sight. His mother, devastated by the news, died of astroke within hours of learning of his plight. His older sister was then charged with caring for the family, but thestresses of the responsibility for herself and her three younger siblings wouldbe too great, and sixteen months later, she, too, passed away.
As he coped with his grief, Kang turned his focus andresolve to his rehabilitation – and refused to accept a fate determined bysuperstition and prejudice. Initiallydenied even the opportunity to take the college entrance exam, he challengedthe system, placed 10th among hundreds of applicants, and graduatedwith highest honors from Yonsei University, Korea’soldest and most prestigious private university.
He then had to successfully lobby the Korean Ministry ofEducation to change its policy that prevented people with disabilities fromstudying abroad. Through the support ofa Rotary Foundation Ambassadorial Scholarship and additional scholarshipsthrough the University of Pittsburgh, in 1976, Kang became the first blindKorean to earn a Ph.D.
Kang was determined to help others follow in his footstepsand to open even more doors for people with disabilities. He wrote an autobiography, A Light in My Heart, which has beentranslated into seven languages, is a U.S. Library of Congress talking book,and was the basis for television and motion picture movies in South Korea. He also created a foundation to promote equalparticipation for the disabled and quickly became an internationally-renowneddisability rights advocate, author, and speaker.
Prior to his appointment to the National Council onDisability, Kang urged passage of legislation in Korea similar to the Americanswith Disabilities Act, and former President George H.W. Bush and former U.S.Attorney General Dick Thornburgh aided in his efforts.
Through his foundation and as a BoardMember of Goodwill Industries International, he founded Goodwill in Korea,which serves thousands of people every year and provides job training andcareer services to people with disabilities and others who are trying to enterthe workforce.
As Vice Chairman of the World Committee on Disability, hewas a driving force behind the establishment of the Franklin D. RooseveltInternational Disability Award. ThisAward recognizes and encourages progress by nations in expanding theparticipation of people with disabilities, in fulfillment of the goals of theUnited Nations World Programme of Action Concerning Disabled Persons.
Kang also served as a Senior Advisor to the Franklin andEleanor Roosevelt Institute and Board Member of the National Organization onDisability. He received many honors andawards, including an Honorary Doctorate in Literature from Yonsei University,being named a University of PittsburghDistinguished Alumni Fellow, and the Rotary Foundation’s Global Alumni Service to HumanityAward.
Kang is survived by his wife, KyoungSook Kang, who retired after nearly three decades of teaching visually impairedstudents in the Gary, Indiana, public school system; his son Paul Kang, anophthalmologist at Eye Doctors of Washington and past Presidentof the Washington DC Metropolitan Ophthalmological Society; his son ChristopherKang, Senior Counsel to President Barack Obama; and four grandchildren.
The memorial service will be held on Sunday, March 4, 2012,at 6pm, at the Korean Central Presbyterian Church, 5451 Lee Highway, Centreville, Virginia, 20121. In lieu of flowers, the family requests thatmemorial gifts be sent to the Korean Central Presbyterian Church or to theRotary Foundation, Dr. Young Woo and Kyoung Sook Kang Peace Fellow Fund(E10860), 14280 Collections Center Drive, Chicago, IL 606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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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인권 운동의 선구자 강영우 박사가2012년 2월 23일 향년68세에 소천하셨습니다.
2012년 3월4일 6pm시에 버지니아주에 소재한 한인 중앙 장로교회에서 (5451Lee Highway, Centreville, Virginia 20121) 추도 예배를 가집니다. 조화는 정중히 사절하며, 조의금은 한인중앙장로교회나, 로타리재단의 강영우, 석경숙 평화장학금 앞으로 보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보내실 곳: RotaryFoundation, Dr. Young Woo and Kyoung Sook Kang Peace Fellow Fund (E10860), 14280Collections Center Drive, Chicago, IL 60693
한국에서 추도 행사는 없을예정이며, 강영우 박사의 이름으로 마련된 기금은 로타리재단의 평화 장학금이 유일함을 알려드립니다.
14살에 시력을상실한 강영우 박사는 한국 최초의 맹인 박사로 지난 2002년 조지 부시 (George W.Bush) 대통령의 임명을 받아 상원 인준을 거쳐백악관 국가 장애 위원호의 정책 차관보를 역임하였다. 백악관 직속 기관인 국가 장애 위원회의 정책 차관보로6년간 연임 하면서, 강영우 박사는 미국의 5400만 장애인을 대변하며, 장애인의 사회 통합, 자립, 권리를 증진시키기 위해 일했다.
1944년 경기도문호리에서 태어난 강영우 박사는 1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그 이듬해 축구공에 눈을 맞아 망막박리로 시력을 잃었다. 아들이 평생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강영우 박사가 시각 장애 판정을 받은 그날 충격으로 세상을떠났다. 졸지에 어린 세 동생의 생계를 책임지게 된 강영우 박사의 큰 누나도봉제 공장에서 밤낮없이 일을 하다 17세의 나이에 과로사로 운명을 달리하게 되었다.
천대와 멸시의 대상으로, 안마사나 점쟁이이로 살아가야만 한다는 운명을 거부한 소년 강영우는 재활에 온 힘을 쏟았다. 입학 기회조차 거부 당했던 강영우 박사는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연세대학교에 10등으로 입학시험에합격하였고, 4년후 연세대학교 문과대학을 차석으로 졸업하였다. 당시 문교부에서는 장애가 해외유학의 결격 사유로 정해져있었다. 강영우 박사는 이 조항을 폐지하는데일조하고, 한국 장애인 최초의 정규유학생이되었다. 국제로타리 재단의 국제 친선장학금 ( Rotary Foundation Ambassadorial Scholarship)과 피츠버그 대학의장학금으로 석사, 박사 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강영우 박사는 1976년 한국 맹인 최초의 박사가 되었다.
강영우 박사는 그의 발자취를따르는 장애인들에게 자신보다 더 많은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그의 평생을바쳐 노력했다. 그의 자서전 “빛은 내가슴에”는 7개국어로 번역 출간되었고, 국회 도서관에 음성도서 (talking book)로 소장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드라마와영화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한국의장애인들의 인권을 제도적으로 증진시키고, 국제적 교류를 통해 장애인의 재활과 사회진출을 돕고자 강영우 박사는 국제교육재활교류재단을 창설하였다.
장애인 인권 운동의 선구자였던강영우 박사는 저자로서, 연설가로서국제적인 명성을 떨치며 활동해왔다. 강영우박사는 그의 오랜 동료이자 친구인 딕 손버그 전 법무장관(Dick Thornburgh), 아버지 부시 대통령과(Former President George H.W Bush) 함께 미국의 장애인 법과 유사한 한국의 장애인 차별 금지법의 제정과 통과를 독려하기도 하였다.
강영우 박사의 국제교육재활교류재단은강영우 박사가 이사로 활동하고 있던 굿윌 인더스트리와 함께 한국 굿윌을 창설하였다. 한국 굿윌은 장애인과 사회 소외계층의 직업창출 및 직업재활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UN 세계 장애위원회의 부의장으로 역임하면서 강영우 박사는 루즈벨트 장애인상 제정을 제안하고창설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상은 지난82년 유엔이 채택한 “장애인 행동 계획”을 실천하고 장애인에 대한 복지향상에 크게 노력한 나라의 국가 원수에게 수상한다. 강영우 박사는 심사위원들에게 자신의 삶을 한국 장애인 인권증진과 복지향상의 훌륭한 예임을 강조해 한국이 루즈벨트 장애인상의 첫 수상국가가 되는데 일조하였다.
강영우 박사의 헌신적인 봉사의삶은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루즈벨트 재단의 고문, 미국 장애인협회의 이사로 재직한 강영우 박사는 연세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 피츠버그 동문회에서올해의 동문상, 로타리재단에서 지구촌인권 봉사상 (Global Alumni Service to Humanity)상을 수상한 바가 있다.
유족으로는 부인 석경숙씨, 장남 강진석 Eye Doctors of Washington안과 원장 ( Paul Kang M.D ), 차남 강진영 백악관 선임법률고문 (ChristopherKang J.D)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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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Americandreamhope.org에서 #36 Article 입니다.
첫째, 자녀들의 성공을 원하시면 왜 지식보다 먼저 꿈을 갖도록 격려하셔야 될까요?
둘째, 미국은 아직 기회의 나라입니다. 왜 그럴까요?
셋째, 부모가 먼저 달라져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위의 말씀드린, 세 가지 질문에 대해서, 생활화 하실 수 있도록, 구체적인 방법을, 말씀 드리겠어요.
첫째, 자녀들의 성공을 원하시면 왜 지식보다 먼저 꿈을 갖도록 격려하셔야 될까요?
많은 사람들이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또한 자녀들이 장래에 성공하기를 바라며 물심양면으로 도와줍니다. 자녀들의 교육도 중요하고 직장과 가정도 중요합니다. 해야할 일은 너무도 많습니다. 뜻밖의 일도 생기고 실패도 여러번 겪게 됩니다.
더구나 미국에 사시는 한인교포들이 당면하시는 수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며 성공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입니다. 정상적인 건강을 갖인 사람들도 어려운데 15살때 시력을 잃은 아버지가 두 아들과 함께 꿈을 이루고 미국 백악관에서도 인정받은 자랑스러운 한인교포가 계십니다.
크리스천 투데이에 “아들에게 단 한번이라도 ‘넌 틀렸어’라고 했다면…..”이란 전 백악관 차관보, 강영우 박사의 성공론에 관한 기사를 알려드리고 또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때로 우리는 ‘성공’에 너무 많은 집착을 갖고 삽니다. 남보다 좋고, 높으며,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을 찾아 종횡무진하고, 남과 비교해 조금이라도 뒤떨어지면 마치 낙오자가 된 것처럼 불안해하기도 합니다.
누구도 부인 못할 이 시대 인간 승리의 주인공, 강영우 박사가 말하는 성공은 무엇일까요? 시대가 좇는 최고의 성공의 자리에 있는 강 박사의 성공론은 의외였습니다. 그는 “성공은 꿈의 성취이자 상대평가”라고 말합니다.
강 박사는 최근 세번째 영문판 「오늘의 도전, 내일의 영광」(Today’s Challenge, Tomorrow’s Glory: Think Globally and Act Locally•아마존닷컴)을 펴냈습니다. 그는 15세 때 불의의 사고로 시력을 잃었지만, 불굴의 의지로 연세대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마치고 교수를 지냈으며, 얼마 전까지는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를 지냈습니다. 두 아들 교육도 성공해 첫째 강진석 씨는 세계가 인정하는 최고의 안과의사로, 둘째 강진영 씨는 미국 백악관 법률선임고문으로 키워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의 진짜 성공은 내면에 존재한다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강 박사는 “포기하지 않는 의지와 끈기,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위한 꿈이 아니었기에 (성공이) 가능했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1등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꿈과 비전을 가졌느냐가 문제지요. 제 두 아들에게도 늘 강조했던 것이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꿈을 가지라는 것이었습니다. 1등은 아니었죠. 사실 우리 두 아들은 성적은 우수했을지 몰라도, 1등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학창시절 최고 성적을 냈던 어떤 누구보다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꿈, 바로 하나님 나라를 이 땅 가운데 이루려는 비전을 가졌기 때문이죠.”
강 박사가 말하는 성공의 포인트는 꿈의 성취이지, 지위가 아니었습니다. 꿈을 꾸니 지위가 따라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꿈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많은 이들을 이롭게 하는 넓은 의미의 꿈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강 박사가 평생을 공부하고 지켜오는 미국 교육 철학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종종 우리는 소중한 자녀들에게조차 상대평가의 잣대를 들이대고 쉽게 남과 비교하면서, 의도하지 않게 ‘꿈을 꺾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두 아들을 훌륭하게 키워낸 강 박사가 듣는다면, 손을 휘휘 저을 이야기입니다.
강 박사는 교육의 가장 중요한 3요소로 “지력, 심력, 체력”을 꼽으며 ‘심력’을 단연 으뜸으로 여깁니다. “지력은 조금 떨어져도, 심력 즉 비전과 꿈을 향한 의지가 확고하다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자 교육학자로서의 신념입니다.
“많은 부모님들이 자녀들의 지력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요. 사실 꿈을 꾸게 해주고, 비전을 확고히 해주는 심력이 더 중요한데 너무 쉽게 간과합니다.”
세계적인 의사가 된 그의 첫째 아들은 3살 때부터 “아버지 눈을 뜨게 해 달라”는 기도를 드렸답니다. 그래서 ‘아버지 눈을 뜨게 해줄 의사’가 되는 것이 그의 비전이자 꿈이 됐습니다. 하지만 꿈에 비해 현실이 따라오지 않을 때가 어찌 없었겠습니까?. 강 박사는 “초등학교 때 그 아이가 우수 학급에 들어가지 못하고 5년 동안 계속 실패를 했었답니다. 그래도 늘 격려해주고 ‘꿈이 있으니까 할 수 있다’고 믿어줬습니다. 그 때 ‘넌 이제 틀렸어, 희망 없다, 그래가지고 의사가 되겠느냐’는 말을 한 번이라도 했다면 제 아들은 절대 지금의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기독교인인 그는 누구보다 ‘상대평가’에 관한한 거센 저항자입니다.
▲강영우 박사의 영문판 3번째 저서, 「오늘의 도전, 내일의 영광」.
“상대평가는 인간에 의해 시작된 겁니다. 언제부터 시작됐는 지 기원조차 모르지만 오랫동안 인간의 생각구조를 지배해 왔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심판하실 때 사람과 사람을 비교하시지 않습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비유처럼 우리에게 서로 다른 재능을 주셔서 그것을 기준해서 평가를 하십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성취해야 하고,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두 달란트를 성취해야하죠. ‘재능과 은사’, 이것이 평가 기준입니다. 곧 꿈의 성취가 개인의 성공을 재는 잣대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영문판으로는 3번째 책인 「오늘의 도전, 내일의 영광」은 현실의 실패와 좌절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높은 꿈을 세우고 힘차게 앞만 보고 전진할 것을 다양한 실례와 경험을 통해 북돋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부시 대통령 부자와의 특별한 인연부터 실제로 만나 속속들이 알고 있는 위인들의 실감나는 사례, 세계 정상 22명을 만나본 강 박사의 꿈을 좇는 스토리들이 들어있습니다.
이 시대, 성공의 획일화된 잣대로 힘들어하는 젊은이들, 연이은 실패로 좌절의 구렁텅이에 빠진 젊은이들에게 다시 한 번 꿈을 가지라고 힘찬 ‘화이팅’을 외칠 책 「오늘의 도전, 내일의 영광」에 소개된 생생한 경험담과 실례를 몇 가지 소개합니다.
강 박사가 꼽은 베스트 실화 첫번째는,
미국 16대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의 큰아들, 로버트 링컨의 일화입니다. 로버트는 젊은 시절 영국에서 유학했지만 첫해 3학기 통틀어 17과목을 낙제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인 링컨은 자식인 로버트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미국으로 데려와 일리노이 스테잇 대학에서 교육을 시켰고, 하버드 대학에 진학시키려다가 또 다시 떨어지고 말았으나 명문고인 필립스 엑시터 아카데미에서 재수를 시키며 노력했습니다.
결국 로버트는 하버드대학에 들어갔습니다. 나중에 변호사가 되고 다음에는 장관까지 됩니다. 로버트는 결국 역경과 고난을 극복하고 갓필드 대통령 때 전쟁수행장관이 되어 꿈을 이뤘습니다. 자식을 향한 포기하지 않는 믿음이 이뤄낸 기적이었습니다.
강 박사가 꼽은 베스트 실화 두번째는,
2002년에 한 어머니가 강 박사의 집회에 참석했답니다. 그녀의 외아들은 반에서 꼴찌인 12학년 학생이었지요. 강 박사의 간증을 들은 어머니가 아들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강 박사님은 실명도 하고 5년 늦게 공부를 시작해서 18살에 중학교 1학년이 되어 대통령을 모시는 차관보 자리까지 갔단다.
그런데 너는 지금 12학년에서 꼴찌를 할 망정, 1년도 늦지는 않았지 않느냐. 그리고 너는 두 눈을 떴지 않느냐? 강 박사님의 체험과 노하우를 알고 이 책을 읽고 그것을 알고 똑같이 하면, 훨씬 일찍이 백악관에 갈 수 있다.”
비록 꼴찌였을지라도 자신에게 꿈과 비전을 심어주고 전적으로 믿어준 어머니 덕분에 아들은 23살에 나이에 백악관에 입성했습니다. 지금부터 딱 9년 전 꼴지를 전전하던 그 학생은, 커뮤니티 칼리지와 4년제 대학을 거쳐 23세에 꿈꾸던 백악관에 입성해 인턴십을 하게 됩니다. 이후 하버드대학 케네디 행정대학원 퍼블릭 폴리시 석사학위를 받고 현재는 연방정부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강 박사가 꼽은 베스트 실화 세번째는,
강영우 박사의 큰 아들 강진석 씨는 세 살 때 기도를 했답니다. ‘사랑하는 주님, 나도 눈 뜬 아버지를 갖고 싶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같이 야구도 못하고, 운전도 못해요. 아버지 눈 좀 뜨게 해 주세요’
강 박사는 “아버지의 눈은 지금은 고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미래에 의학이 발달해서 고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꿈을 심어줬습니다. “네가 의사가 되어서 아버지 눈을 고쳐주면 어떻겠니?” 어려서부터 아버지 눈 고쳐주는 생각을 꿈으로 간직했던 큰아들이 이제는 세계적인 안과의사와 교수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강영우 박사는
연세대학교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도미하여 피츠버그대학교 교육학 철학 박사학위를 따 한국 장애인 최초 박사가 되었습니다. 이후 부시 행정부 7년간 백악관 직속 장애 인권위원회 정책 차관보를 지냈으며, 2006년 케네디, 레이건, 클린턴 등의 미국 대통령, 록펠러, UN 사무총장 코피 아난 등과 함께 127인의 위인으로 선정되어 루스벨트 홍보센터 강당의 기념 의자에 기록되기도 했습니다.
저서로는 「빛은 내 가슴에」(기독교방송사), 「강영우 박사의 성공적인 자녀 교육법」(두란노서원), 「교육을 통한 성공의 비결」, 「어둠을 비추는 한 쌍의 촛불」(석은옥 공저), 「아버지와 아들의 꿈」, 「우리가 오르지 못할 산은 없다」, 「내 안의 성공을 찾아라」(이상 생명의말씀사) 등 영어판을 포함 총 14권이 있습니다.
위의 기사는 희망과 도전을 주기에 몇가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많은 사람들이 잘 살려고 또는 성공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고 계십니다. 잘 사는 것과 성공한다는 것은 각 사람의 생각과 기대에 따라 다르겠습니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성공이라는 사람들도 있고, 좋은 직장이나 직업을 갖어야 성공이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반면에 강영우 박사는 성공론에 관해서 그는 ‘성공은 꿈의 성취이자 상대평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강박사는 열 다섯살때(15), 불의의 사고로 시력을 잃었으나 불굴의 의지로 연세대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마치고 교수를 지냈으며, 얼마 전까지도 백악관 국가 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를 지냈습니다.
두 아들 교육도 성공해 첫째 아들 강진석씨는 세계가 인정하는 최고의 안과의사로, 둘째 강진영씨는 미국 백악관 법률 선임 고문으로 키워냈습니다. 얼마나 자랑스러운 한인교포 가정입니까?
3). 꿈과 비전에관해 강박사님은 중요한 몇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a). 1등이 중요한것이 아니고, 어떤 꿈과 비전을 가졌느냐가 문제입니다.
b).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꿈을 갖이라고 두 아들에게 항상 강조하고 생활했답니다.
c). 하나님 나라를 이땅 가운데 이루어서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꿈과 비전을 갖였습니다.
4).성공의 포인트는 많은 사람들을 유익하게하는 넓은 의미의 꿈이여야 합니다.
5). 강박사는 교육의 가장 중요한 3요소는 지력, 심력, 체력을 꼽으며, ‘심력’을 단연 으뜸으로 여겼습니다.‘지력’은 조금 떨어져도, 심력 즉 꿈과 비전을 향한 의지가 확고하다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답니다.
6). 많은 부모님들이 자녀들을 지력에 많은 관심을 갖이고 있습니다. 사실 꿈을 꾸게 해주고 비전을 확고히 해주는 심력이 더 중요한데 너무 쉽게 간과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7). 자녀들에게 ‘넌 틀렸어’ ‘넌 희망없다. 그래가지고 되겠느냐’ 라는 말은 절대로 삼가야 된다고 합니다.
8). 상대 평가는 인간에게 의해 시작됩니다.
그 반면에, 하나님이 주신 재능과 은사를 어떻게 각자에게 주신 꿈과 비전을 이루는데 적용했느냐가 평가 기준이 되야겠습니다. 성공의 획일화된 이 시대에 힘들어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꿈을 갖이라고 힘찬 화이팅을 외쳐야겠습니다.
요한복음 15:7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미국은 아직 기회의 나라입니다. 왜 그럴까요?
세계 여러 나라들이 미국의 정치방향에는 비록 반대를 하면서도, 자기의 자녀들을 미국에 유학을 보내고 있습니다. 자유와 기회의 나라이기 때문이라고 보겠습니다. 비록 영어를 잘 못해도 미국에와서 배우고 꾸준히 노력을 하면 꿈을 이룰 수 있는 나라가 미국입니다.
한국일보 8월 30일,2011년, 오피니언에, 여주영, 뉴욕 주필의 글은 희망과 용기를 주기에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한국속담에 “개천에서 용났다”는 말이 있지요. 비천한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이 출세할 경우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실제로 예전에는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아무리 가난하고 별 볼일 없는 집안에서 자랐어도 본인만 똑똑하면 일류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고 또 졸업 후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었답니다. 판•검사 중에도, 장•차관 중에도, 대학교수 중에도 ‘개천에서 난 용들’이 많았답니다. 이명박 대통령도 행상하는 어머니 밑에서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면서 공부한 끝에 현대건설 사장이 됐고, 서울시장이 됐고, 급기야 대한민국의 17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에서는 이런 속담을 좀체 들을 수가 없습니다. 아예 들을 생각도 못하는 시대가 돼버렸지요. 일류대학 출신, 일류회사 직원이 아니면 어디서도 행세할 수 없고, 인정받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일등이 되기 위해 본인은 물론, 온 가족이 나서서 전쟁을 치릅니다. 부자들은 돈을 쏟아 부어 자녀들에게 온갖 과외공부를 시킬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전쟁을 치르기가 수월합니다. 하지만 가난한 집 자녀들은 과외나 특별수업 같은 것은 꿈도 꾸지 못해 자연히 경쟁에서 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우리 같은 소수민족에게도 여전히 기회의 땅으로 남아있습니다. 한인들에게 미국에 온 이유를 물으면 십중팔구 보다 나은 자녀교육을 꼽고 그 뒤를 이어 한국보다 제약이 덜한 비즈니스 환경을 꼽지요. 우수한 교육환경 속에서 자녀들을 열심히 공부시켜 미국 속의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 기르고 경제적으로도 안정을 이뤄 노후를 풍요롭고 안락하게 지내겠다는 뜻입니다.
한인들은 이를 위해 맨손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땀을 흘렸습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이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웠고 부도 일구는데 성공했습니다. 기회의 나라 미국에 이민 온 목적을 나름대로 달성한 사람들입니다. 어느 민족보다 뜨거운 한인부모들의 자녀교육에 대한 집념과 열기의 소산입니다.
미국에서 자란 한인 2세들이 저마다 주류사회 곳곳에 진출해 괄목할만한 위상을 펼치고 있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미국이 아직도 기회의 나라라는 것은 개천에서 용이 날 가능성이 여전히 많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주류사회 또래들보다 상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자기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며 치열한 경쟁에서 이긴 우리 2세들이 이미 수없이 많이있습니다. 이들은 지금 보이지 않는 주류사회 곳곳에 진출해 한인사회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최근 본보가 한인봉사센터와 함께 해마다 주최하는 청소년 봉사프로그램에 대거 참가한 학생들의 모습을 보고 이민 1세들이 미국에서 이뤄낸 2세 한인들의 교육이 성공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인 2세 고경주박사가 차관보급 연방고위직에 있고, 그의 동생인 고홍주박사가 역시 연방국무부의 차관보급 요직인 법률고문직에 있습니다. 휴렛재단의 리아 서 프로그램 오피서는 연방 내부부 차관보에 임명됐었습니다.
백악관 주요 부서에도 현재 10여명의 탁월한 한인 2세들이 포진하고 있습니다. 특히 몇 해 전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직에 시각장애인 강영우박사가 발탁된 것은 장애인에 대한 편견으로 장애인이 기를 못 펴는 한국과 달리 미국에서는 얼마든지 실력을 인정받을 수 있음을 확실하게 입증해준 사례입니다. 강 박사의 아들 크리스토퍼 강도 이번에 연방판사 인사를 좌지우지 하는 대통령 선임 법률고문직에 발탁됐습니다.
미국속의 한인 자녀들도 능력만 있으면 누구든지, 또 어디서든지 실력을 발휘할 수 있고, 그 실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인만 잘하면 얼마든지 ‘개천에서 난 용’이 될 수 있는 나라가 곧 미국입니다.
여주영, 뉴욕 주필, 한국일보, 입력일자: 2011-08-30 (화)
모세가 80세때에, 아브라함이 75세때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이민올 때의 꿈을 이르셨으면, 이제 더 큰 꿈과 비전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셋째, 부모가 먼저 달라져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중앙일보 4월 9일, 2011년, 청소년과 성인 프로그램 디렉터인 이규성씨의 기사는 많은 부모님들에게 희망을 드리며, 지혜로운 말씀이기에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욕심은 비단 공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에도 큰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제의 환경'에 익숙한 부모세대와 '오늘의 환경' 속에서 자란 아이들의 행동에 대한 생각은 다를 수밖에 없지요.
특히 문화와 풍속이 다른 곳에서 자라난 아이들일수록 부모의 생각과는 다른 면을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법이나 언어 몸가짐이 그렇고 어른을 대하는 태도 역시 부모세대의 기대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아이들의 행동이나 몸가짐이 가정교육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고는 하지만 시대 상황이나 문화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런 걱정거리들이 늘 부모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지만 딱히 속 시원한 방법은 찾을 길이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고 아이들의 행동을 그대로 받아들이자니 거부감이 일고 일일이 지적하면서 고치라고 말하기에는 여러 가지 환경조건이나 시기 등이 너무 늦어서 가슴앓이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민사회에서는 이 사회에 잘 적응해 나가고 있는 아이들에게 변화를 요구하기보다는 부모가 이를 수용하고 받아들여 세대간에 일어날 수 있는 문제를 사전에 예방하는 방법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부모들은 새로운 문화와 환경에 대한 이해를 높여야 할 뿐 아니라 아이들을 이해하려는 노력도 뒤따라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들의 교육에 일차적 책임이 있다고는 하지만 삶에 바쁜 사람들에게 차분하게 앉아서 아이들과 대화하며 예절이나 행동지도를 하기에는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럴 때 전문 기관에서 자녀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행동'을 지도할 수 있도록 교육과 정보를 부모들에게 제공해 주는 일은 이 사회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가정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방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모들이 이런 교육에 적극 참여하는 것은 자녀들에게 심리적 안정감과 자신감을 심어주고 부모 스스로는 걱정과 근심을 더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에베소서 6: 4절에,
아비들아 너의 자녀를 노엽게 하지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안내의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어요>
American Dream Hope 사역은, 비 영리 단체로서, 봉사를 통한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소망과 꿈을 이루도록, 도와주는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갖고있는, 잠재 능력을 개발하여, 소망과 꿈을 이루시며, 남을 돕고, 섬기는 사역입니다. 많이 동참 하시기 바랍니다.
American Dream Hope 의 website는 www.americandreamhope.org 입니다
Paul Park (714) 719-3006.
오늘의 소망과 꿈을 이루는데, 필요한 생활의 지혜 세 가지를, 요약해서 말씀드리고, 마치려고 합니다.
첫째, 자녀들의 성공을 원하시면 비록 자녀들이 잘못하거나 실수하더라도 ‘너는 틀렸어’ 또는 ‘너는 아무것도 못 할꺼야’ 등등 부정적이며 자신감을 잃게하는 말은 삼가해야 되겠습니다.
항상 격려하며, 잘 하는 것을 찿아서 칭찬하면, 자녀들이 힘을 얻고 다시 도전하여 옳바른 방향으로 성장하겠습니다. 몇번 실패했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어떻게 부모님이 그때마다 생활의 모범이되어 용기를 북돋아 주느냐가 중요합니다.
실패는 결과가 아니고 꿈을 이루며 성공으로 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꿈을 심어 주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둘째, 아시는 것처럼, 미국은 다른 어느나라 보다 기회와 자유의 나라입니다.
이곳에 와서 살수있도록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잠시 왔다가 가는 인생을 허송세월 하시지말고,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고, 그의 뜻을 이루시려고 성령님의 인도를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옛말에 웃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고, 자녀들의 장래를 위한다면, 일상생활에서 부모가 먼저 언어와 행동을 자녀들에게 모범을 보이면서 가르쳐야 되겠습니다. 특히 문화나 언어가 다른 환경에 살기때문에 부모님들의 특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뜻이 있으면, 길도있다고, 모든것을 주님과 함께하실때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