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 성산교회
왕길지 선교사와 부인 클라라.(왼쪽 사진) 1970년대로 추정되는 사택 앞 사진.
옹성에서 바라본 언양제일교회.(위 사진) 남문 영화루 뒤로 언양초교가 보인다.
변인덕 목사, 김도헌 장로, 최춘식 원로장로(왼쪽부터)가 옛 당회록을 살피고 있다.
내가 워낙 어린 시절때 일이라 기억나는 부분만이라도 분명하게 쓰려고한다
우리 가족은 원래 평양이 고향이고 나도 물론 평양에서 태여났으며 8살까지는 평양에서 살았던 평양 본토바기이다
평양 시내 중심지 높은 언덕위에 산정현교회가 있었고 우리교회
산정현교회는 주기철 목사님을 당회장으로 모시고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리던 교회였으며 우리부모님 역시 산정현교회 제직이셨다..
산정현교회 본당 앞에 서서 낮은곳 멀리내려다 보면 한눈에 대동강이 보인다.
찬송가 가사에 있는것처럼 참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 솔로몬의 옷보다 더고운 대동강경치가 한눈에들어온다 참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찬송가가 절로나올만큼 아름다은곳이 평양이다
에메랄드 빛갈의 푸르고 맑은 대동강물은 남남 북녀 라는말이 있듯이 평양에 미인이 많이 태여날수있는 조건에 하나이다라는 말도있다 .
악독한 일본 치하에서도 주님을 믿는 신앙심이 강한것은 물론이고 교인 한사람 한사람이 독립투사와 같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주님을 믿는 믿음의 절계를지키며 나라를 되찾으려고 일본이름으로 고치지 않은 교인이 몇집이 있었는데 나의 친정 아버님도 그중 한분이다 나의 아버님은 해방후에도 일본사람 이라면 치가 떨린다고 하셨다
일본놈들하고 대항을 하시며 싸우시며 오랜세월 옥살이를 하시다가 순교하신 주기철 목사님을 잃고 교인들은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잃은것 같이 슬픔에 잠겨 있을때 8월15일 해방과 더불어 출옥하신 한상동 목사님을 당회장으로 모시려고 했으나 오랜세월 옥고를 치르신뒤라 너무 허약 하셨기 때문에 남쪽 고향이 있는 곳으로 가셔서 조금 쉬고 싶다고 하시면서 사양 하셨다고 한다
사양하실때 산정현 교회 제직들이 너무 속상해서 목사님 마음대로 할수있다면
한대 때리고 싶다고 까지 했었다는 말까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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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시절 이인재 목사님은 평양신학교 신학생으로 주기철 목사님 감옥에 들어가시면 때때로 산정현교회 주일낮 설교 저녁 ,수요일 저녁예배 설교를 하셨는데 어느날 이인재 전도사님도 일본놈들의 의해 끌려가 감옥생활이 시작되고 오래 고생하시다가 해방과 함께 감옥생활을 면하게되셨다 .
그시절 어떤분은 이인재 전도사님이라고 부르고 또 어떤분은 이선생님이라고 불럿다고 한다
그때 북쪽은 쏘련 남쪽은 미국의 도움을 받게 돠여 우리나라는 북쪽은 빨지산 출신들이 정치에 간섭하면서 토지개혁을 했고 기독교신자들을 핍박하고 재산을 몰수하고 또다시 교인들을 잡아가는 일이 많아져가고 있어서 하루 하루 살아가기가 힘들어지는 북한땅이 되여가고 나라는 두동강이로 갈라져서 38선이 생기게 되여 평양 산정현교회 교인들은 목자를 읽은 양무리가 되여 교회안에는 의견충돌 끝에 싸움을 하게 되여 산정현 교회역시 둘로 갈라지고 언제나 싸음에는 선과 악이 있게마련인데 악한쪽은 교회건물을 차지하고 선한쪽은 목장을 경영하고 있던 교인 남 집사 박덕술 집사님의 소 외양간으로 나오게 되여 산정현교회 역시 두동강이가 되였다
교인들은 목자를 잃은것도 너무 슬프고 괴로운데 교회 건물까지 빼았겼으니 앞날이 캄캄한 날이 계속되였으며 목자를 읽은 양들은 한가족 한가족이 남쪽으로 신앙의 자유와 삶에 자유가있는 남쪽으로 가야만 살길이라고 생각을하고 38선을 넘게되였다고한다 막상 남쪽 서울에 몇몇의 산정현교회 교회 건물울 양보하고 소외양간으로 나왔던 제직 몇분이 서울에서 만나 우선 주일이면 주님께 예배를 들여야한다고 서울 신당동에 성산교회가 설립되였다고 한다
성산교회는 이름은 성산으로 지였지만 내막으로는 평양 상정현교회가 남으로 이동해왔다고 할만큼 평양에서 38선을 넘어 피란을 온 교인이 80% 정도가 된다고했다
평양 산정현 교회 교인들은 주기철 목사님의 순교의 정신을 이어받아 예수님을 믿는 독실한 기독교인인 동시에 애국자들이였기 때문에 나라를 사랑하며 우리들의 믿음을 잘 인도해 주실분을 만나야 한다고 여러목사님을 찿아보던중 이인재 조사님은 주기철 목사님과 함께 감옥에서 고생을 하셨던분이라 가장적합하다고 생각을하고 결정을하였다고 한다
이인재 목사님은 그시절에는 이인재 조사님이라고 우리는 불렀다 .
성산 교회 건물은 적산집 (일본사람들이 살다가 버리고간집) 이였다
아주 큰집 평양에서 산정현교회 여자집사님 이셨던 송소영 집사님의 집이였다.
아래 층에는 집주인가족 그리고 한쪽에 이인재 조사님가족이 부엌
그리고 방 2~ 3개를 쓰고 계셨던것으로 기억이된다.
주일이되면 38선을 넘어온 교인들이 만날때마나 무척 반가운 얼굴들 이였던것 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도나고 서로가 언제 어느 방법으로 38선을 넘었는가 서로 물으며 교회에서 만나면 헤여지기가 싫어서 때로는 저녁 예배까지 들이고야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 번번했다
그런데 38선 북쪽에 가족을 두고온 남자 혼자온 교인이 많았다
남자교인이 월등하게 많았으며 창립 첫주는 약 70명의 교인이였으나
낮예배후 젊은 주일학교 선생님들.성가대원. 제직들도. 큰 북을메고 약 20 명 교인이 한팀이되여
한주도 빼놓치 않고 큰길에 나가서 노방전도를 하여 교인은 매주 많이늘어 일년이 되지 않았어도 약200명 정도의 교인이늘어 교회 부흥은 참으로 놀라운 발전이 있는것을 나는 어린나이에도 알수있었다
믿는사람들아 군병같으니…..
피란처 있으니 활란을 당하자 …… 주예수를 믿으라 외치던 소리가 아직도 쟁쟁하게 들려오는것같다
열심이 찬송가를 불으던 기억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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