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계한 '성악의 제왕' 파바로티
(서울=연합뉴스) 경수현 김영섭 기자 = 6일 세상을 떠난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와 함께 '세계 3대 테너'로 꼽혀온 인물로 '성악의 제왕'으로 불려왔다.
그는 다양한 레퍼토리와 함께 높은 음역에서 멀리 뻗어나가는 맑고 깨끗한 음색으로 대중적 인지도가 가장 높은 클래식 음악가로 평가받아 왔다.
파바로티는 1935년 10월12일 이탈리아 북부 모데나에서 태어나 빵집을 하는 부모 밑에서 외아들로 컸다. 유년시절에는 음악보다 축구에 더 관심을 가져 고향 사람들에게는 축구선수로 먼저 알려졌다.
오페라 애호가이자 타고난 재능으로 '아마추어 테너'로 평가받던 아버지와 함께 모데나 지역 로시니 말레 합창단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으며 이 합창단이 국제 대회에서 수상하자 음악을 본업으로 삼겠다는 결심을 굳힌다.
결국 그는 26살 때인 1961년 레지오 에밀리아의 오페라 하우스에서 푸치니 오페라 '라 보엠'의 로돌포 역할을 맡으며 오페라 무대에 공식 데뷔한다. 1965년 1월에는 성악가 조안 서덜랜드와 함께 미국에도 진출한다.
파바로티를 세계적인 성악가로 자리잡게 한 것은 1972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에서 펼친 도니체티의 '연대의 딸' 공연이다. 그는 이 공연에서 여러 번의 하이C(3옥타브 도)를 불러 '하이C의 제왕'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특히, 1988년 독일 오페라하우스에서 가진 '사랑의 묘약' 공연에서는 박수가 무려 1시간7분이나 쏟아졌고 165번의 앵콜을 받아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1990년대 이후에는 로마월드컵 전야제 때 선보인 '3대 테너 콘서트'를 통해 대규모 관중을 동원하는 야외공연을 자주 열었다.
전통 성악가이면서도 종종 대중 가수들과도 함께 공연했는데 지난 1991년 런던 하이드파크 공연 때는 15만명의 관객들이 운집했다.
또 그의 마지막 공연이 된 작년 2월 토리노 동계올림픽 개막식에서는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 중 아리아 '공주는 잠 못 이루고'(Nessun dorma)를 불러 3만5천명의 관중들을 사로잡았다.
파바로티는 남북정상회담의 성공적 개최를 기념해 지난 2000년 열린 '한반도 평화 콘서트' 등 몇차례 내한공연을 갖기도 했으며 한국인 성악가들과 함께 오페라 무대에 선 적도 있다.
지난 1989년 파바로티와 함께 오페라 '사랑의 묘약' 공연에 함께 선 바리톤 최현수(49)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굉장히 소탈하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두어번 얘기를 들으면 외워버릴 정도로 머리도 좋은 분"이라며 "정말 안타깝다"고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최 교수는 또 "파바로티는 완벽한 목소리의 기술을 가진 대가이면서도 부족한 면을 채우느라 꾸준히 공부를 하기도 했다"며 "역사적으로 유명한 다른 테너들에 비해서도 긴 전성기를 구가했다"고 덧붙였다.
한편 파바로티는 지난 2003년 12월에 35년 연하의 여자친구이자 개인비서인 니콜레타 만토바니와 결혼식을 올려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파바로티는 1994년 모데나 대학의 경제학과를 다니던 만토바니를 처음 만났으며 그후 만토바니가 그의 개인 비서로 일하게 되면서 급속히 가까워졌다.
둘의 관계가 알려지면서 파바로티는 지난 1961년 결혼한 부인 아두아 베로니와 별거했고 2000년에 결국 이혼했다.
파바로티는 베로니와의 사이에 장성한 세 딸을 두고 있으며 만토바니로부터는 앨리스라는 딸을 얻었다
올해 71세인 그에 대해 일각에서는 전성기를 훌쩍 넘겨 은퇴 시기를 놓치면서 '오페라 스타라는 고급 이미지로 떼돈을 벌었다'라는 비난도 나오고 있다.
실제로 그는 작년 7월 뉴욕의 한 병원에서 췌장암 수술을 받을 당시까지도 고별 순회공연을 준비 중이었으며 그 때 이후 대중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푸치니의오페라 "라보엠" 중에서
"그대의찬손"
테너-파바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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