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응로 화백

금수강산 0 4,130 2011.03.03 11:41

오늘은 고암(顧菴) 이응노(李應魯, 1904~1989)의 작품을 감상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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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노 선생은 전의 이씨(全義李氏) 후손입니다.


000116_01.jpg충청남도 홍성군에서 전의 이씨 이근상씨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꼬장꼬장한 선비 가문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웠는데,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자 다른 이들과 같이 홍성 보통학교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일본식의 신식교육을 시킬 수 없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중간에 학업을 그만 두고 맙니다.


이응노의 반골 기질은 어쩌면 아버지에게서 이미 예감된 것입니다.


그러나 전통 선비 교육을 시키려는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고 이응노는 그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근처 수덕사 등으로 스케치를 가는가 하면 당진군에 사는 송태회라는 분에게 그림을 배우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스무 살이 될 무렵 이응노는 상경을
결심합니다.


상경한 이응노는 해강 김규진 문하에서 서예와
문인화를 배워 1924년 그이 나이 스무 살 때 조선미술전람회에 청죽(靑竹)으로 입선을 하면서 화단에 얼굴을 내밀게 됩니다.


옆의 작품은 그 몇 년 후에 그린 것인데 바람에
휘날리는 대나무 잎의 모습을 잘 표현하였습니다.


1935년이 되자 그는 일본으로 건너갑니다.


일본에서 그는 일본 남화(南畵)계의 거두인 마쓰바야시 게이게쓰(松林桂月)의 문하에 들어가 그림 수업을 하면서 동시에 당시 일본에 유입되어 확산일로에 있던 서양화 기법도 관심있게 살폈습니다.


쓸데 없는 이야기지만, 송림계월이란 이름이
재미있군요. 소나무 숲에 계수나무 달이라...


그후 우리 나라는 해방을 맞이합니다.


해방이 되자 고암은 해강 김규진의 아들인 청강 김영기와 지나간 글에서 소개해 드린 월전 장우성과 같이 단구미술원(檀丘美術院)이란 단체를 조직합니다.


그는 일찍이 야인 기질이 농후했습니다. 아니 야인 기질이라기 보다는 반골적인 성격이 강했나 봅니다.


월전은 서울대학교의 교수로 들어가서 후학 양성에 몰두했고 청강은 청강 대로 연구활동과 집필 활동에 몰두하면서, 특히 월전은 조선미술전람회의 형식을 답습한 한국미술전람회(國展)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명성을 날릴 때, 이응노는 오히려 국전에 폐단을 지적하면서 재야 화가의 길로 들어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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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나고 전후 복구가 한창이던 1957년, 고암은 뉴욕의 월드하우스 갤러리(World house Gallery)에서 주최한 현대한국미술전에 참가하게 됩니다.

국제 무대에 처음으로 진출을 한 셈이었습니다.


그 전시회에서 고암의 작품은 프랑스 평론가 쟈크 라센느(Jacque Lassaigne)의 관심을 모으게 되었고, 쟈크 라센느는 1957년에 이응노를 프랑스로 초청하게 됩니다.

그때부터 고암은 프랑스에 정착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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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작품들은 1960년대의 추상 작품입니다.


아울러 화판에 다른 재료를 붙이는 콜라주 기법도 동원하고 여러 가지 모티브를 시도해 봅니다.


그러던 중 1967년 저 유명한 '동백림' 사건이 터집니다.


그 사건의 진위 여부는 나로서 알 수 없으나 당시 기억으로는 고암 부부가 북한의 돈(첩보 활동비)을 받은 적이 있고, 동 베를린을 통해 북한으로 가려다가 우리 요원들에게 잡혀서 한국으로 소환된 사건인 듯합니다.

한국으로 소환된 고암은 옥고를 치루게 됩니다.


고암은 옥중에서도 왕성한 작품 제작을 하였습니다.
그 후 국제적인 여론과 특히 프랑스 정부의 요청으로 풀려난 고암은 다시 프랑스로 돌아갑니다.

그 무렵부터 고암은 글씨를 변형하여 표현하는 문자추상 시리즈를 발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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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1977년에 다시 정치적 사건에 연루됩니다.


그 때까지는 국내에서 그의 작품을 전시하는 모습을 볼 수도 있었습니다만, 그 이후부터는 이응노의 전시회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가 1989년 작고할 때까지 한번도 고국 땅을 밟을 수 없었고, 쓸쓸히 타국에서 숨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작고할 무렵에 어떤 신문의 기자와 인터뷰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기사에서 고향인 홍성땅을 한번 밟아 봤으면 하는 소원을 얘기하더군요.


그러다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고암의 작품 경향은 또 한번 탈바꿈을 하게 됩니다.


당시 국제적인 평론가들은 반핵과 반전의 의미를 고암의 작품을 통해 설명했습니다만, 한국의 평론가들은 80년 광주의 함성을 그림으로 표현했다고들 말합니다. 특히 이응노미술관이란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단호하게 주장합니다.


............. 1980년 5월의 광주항쟁은 화가들이 다시 현실에 대해 발언하고 민족 정서에 기초한 새로운 조형언어를 만들어 내는 동인이 되었다. 멀리 타국 땅에서 고암 또한 광주항쟁에 호흥하여 '인간'시리즈를 제작하였다..........


그러나 내 생각은 좀 다릅니다.


사실은 표현 방법상의 문제만 남아있었지 1976년 무렵부터 군상에 대한 제작의도가 있었다고 봅니다. 위의 군상이란 그림에서 그것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70년대 중반부터 그런 의도가 있었다면 80년대에 수묵 군상 작업으로 전환된 이유를 몇 가지 들어 보겠습니다.


우선 그 표현에 있어서 채색작업 보다는 수묵 작업이 훨씬 쉽습니다.


또한 서양에서는 채색보다 수묵이 훨씬 신선한 느낌을 줍니다.


게다가 더 중요한 것은 수묵은 감정의 표현이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붓을 휘두를 때의 필력과 감정이 그대로 화선지에 배어듭니다.


하긴 작가의 의도를 지금 누가 어떻게 알겠습니까...내가 그린 내 그림도 의도를 모를 때가 많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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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말년에 그린 그의 역동적인 인간군상 시리즈는 참으로 역작이며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어쩌면 이국땅 이름 없는 시골 아트리에에서 쓸쓸하게 여생을 보낸 노작가의 외로움이 그대로 표출된 것은 아닐까요.

인간에 대한 갈구와 온 세상의 인간들에게 외치고 싶은 무엇을 그는 이런 형상으로 표현한 게 아닐까요?

아니면 군중 속의 고독처럼, 메마른 삶을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서로의 연관성과 인과성을 외치려는 몸부림일까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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