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의 어머니는 아이의 잠을 지켜주고 있는 것일까요,
아이의 죽음을 거부하고 있는 것일까요?
어머니에게 이 순간, 손을 내밀 사람이 있기나 할까요?
(1961년 부산. 길가에서 구걸하고 있는 모녀의 모습이 뒤에 있는 간판과 대비된다.)
삶을 응시하는 자들이 키워가는 세계에서 우리들이 살고 있습니다.
(1976년 부산. 자갈치 시장의 생선장수 아주머니가 아이를 업고 자장면으로 점심식사를 대신 하고 있는 모습)
고되게 살아가는 자들에게서 느껴지는 아슬아슬한 질서와 안정감이 외면하고 싶을 만큼 서글픕니다.
(1959년 부산. 한 부둣가에서 생계를 위해 찐고구마를 팔고 있는 모자의 모습은 오히려 잘 먹지 못 해
영양실조에 걸린 것처럼 보인다.)
일찍 어른의 모습이 되어버리는 아이들의 얼굴에선 미래가 암초처럼 모습을 나타내곤 합니다.
(1957년 부산. 이 시절에는 두 소녀처럼 학교도 못 가고 가사를 돌보며 사는 아이들이 많았다.)
거리의 부녀를 눈여겨보세요. 손으로 소음을 막아주고, 다리로 허우적거리는 아이를 잡아주며
아버지는 딸아이의 잠을 지켜주고 있습니다. (1963년 부산)
본질에서 떨어져야만 아름다운 것들이 있습니다. 그만큼의 거리에서 빨래는 남루를 씻어버린듯 눈부시고
햇살은 명랑한 아이들처럼 골목을 뛰어다니지요.
(1963년 부산. 태극촌이라는 종교마을의 전경. 기하학적으로 보이는 이 판자촌은 당시 북한과 타지방에서
이주해온 피난민들이 주로 살고 있었다.)
불순함이라고는 없는 노동에 저토록 수모를 당해야 하다니 때로 세상의 정의가 불한당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1972년 부산. 자갈치 시장에서 한 노점상 여인이 단속반에 끌려가고 있는 애처로운 모습)
육신의 한 부분을 미리 자연 속으로 돌려보낸 사람들의 삶도 도무지 가벼워 보이지가 않습니다.
(1985년 부산. 극장가에서 비가 오거나 눈이 와도 그곳을 지키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청년의 모습)
삶의 속도에 의해서 진창을 벗어날 때도 있고 속도 때문에 진창에 처박힐 때도 있습니다.
(1978년 부산. 역전에서 비오는 날 한 아이가 자전거를 타다가 물이 튈까봐 다리를 들어올리는 모습)
이토록 다른 정서적 이질감 때문에 웃을 수 있는 것도 아직은 우리의 정신이 여유 있기 때문이지요.
(2002년 부산. 역전의 공중전화에서 두 여인이 전화를 걸고 있지만 그 모습이 묘한 대비를 보이고 있는 장면)
구불구불한 길에 뒤덮인 저 육체! 산다는 것은 제 몸속에 길을 내는 것입니다.
(1975년 부산. 범어사에서 주름이 깊은 할머니가 열심히 기도를 드리고 있는 모습)
어른들 세계로 팔을 쭉 뻗는 아이들은 언제나 밝은 것을 희망합니다.
그 아이들은 어둠 속에서도 열심히 빛을 향해 발돋움하겠지요.
(1980년 부산. 용두산 공원에서 놀고 있던 두 소녀가 손을 번쩍 올리고 있다.
가난하지만 행복해 보이는 모습)
자신의 삶을 스스로 더 가파른 곳에 올려놓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때라야 평지에 있는 자신을 향해 웃을 수 있는 것일까요?
(1968년 부산. 자갈치 시장에서 짐을 기다리던 지게꾼이 사진작가를 보며 활짝 웃고 있는 모습.
외로움과 죽음의 관념을 이겨내고 비로소 환해지는 우리의 영혼처럼...
(2004년 부산.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갈매기 한 마리가 할머니 머리에 잠시 앉았다.)
[ 사진작가 최민식, 시인 조은이 엮어낸 감동적 사진에세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