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혜석 최초의 여성 화가

금수강산 0 4,060 2010.08.30 22:05

순간의 사랑 때문에 파멸의 길로 들어선 최초의 여성화가

나 혜 석 (1896.4.18~1948.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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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나주. 호 정월(晶月). 경기 수원 출생.
1918년 일본 도쿄[東京]여자미술학교 유화과를 졸업하고,
1920년 김우영(金雨英)과 결혼하였다.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제1회부터 제5회까지 입선하였고,
1921년 3월 경성일보사 건물 안의 내청각에서
한국 여성화가로서 최초의 개인전을 가졌다.
1926년부터 3년간 남편과 함께 세계일주,
귀국 도중 파리에서 그린 정원화(庭園畵)가 도쿄의 이과전(二科展)에 입선되었다.
한편, 1918년 《경희》 《정순》 등의 단편소설을 발표하여 소설가로도 활약하였다.
1929년 이혼하고 충청남도 공주의 마곡사(麻谷寺)에 들어가 수도생활을 하였다.
대표작으로 《누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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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주 떠나기전 나혜석과 김우영 1927년 6월 19일

우리나라 여성작가로,그리고 자유로운 연애사건과 연애관으로 당시 사회에서 엄청난
파문을 던졌던 나혜석. 하지만 이혼사건이후 작품세계도 점점위축되고,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쪼그라 들면서 아무도 지켜보는 이도 없는 채
쓸쓸한 삶을 마감한 안타까운 신여성이자,화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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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남매 아해들아!

에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에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

후일, 외교관이 되어 파리 오거든

네 에미의 묘를 찾아 꽃 한 송이 꽂아다오

1896년(1세) 4월18일(호적상으론4월28일) 경기도 수원에서 나주 나씨 나기정(羅基貞)과
수성 최씨의 최시의(崔是議)의 5남매(호적상으로는 계석을 제외한 4남매)중 넷째로,
딸로서는 둘째로 태어났다. 본적은 경기도 수원군 수원면 신풍리 291번지

(지금의 수원시 장안구 신풍동 45번지 일대)이며,

아버지 나기정은 한일합방 전후 군수를 지낸 개명관료였다.
원래 이름은 나명순(호적상이름은나아기)

1910년(14세) 6월 수원 삼일여학교(나혜석의 사촌오빠인 나중석이 1920년 수원 보시동 북감리
교회내에 설립한 사립삼일여학당으로 1909년 삼일여학교로 변경하였다.

나혜석은 1910년 신학제에 의한 제1회 졸업생 4명중 한명이었다. 현재의

매향여자경영정보고등학교로 바뀜)졸업.
9월 1일 서울에 있는 진명여학교에 진학했다. 두살 아래인 동생 지석도 함께

진학하여 자매는 함께 기숙사 생활을 했다

1912년(16세) 진명여학교 3학년 때는 7명의 동급생 중 급장이었고 1등을 했다.

1913년(17세) 나혜석 집안엔 개화기 물결이 밀어닥침.큰오빠는
와세다 대학을 나온 후에 다시 중국 북경대학을 마침.작은오빠는 일본 동경공대 졸업.
나혜석은 이때 3월28일 진명여학교 3회(평균99점우등생 졸업,매일신보4월1일보도됨),
고동보통학교1회로 졸업 당시성적은 졸업생 일곱명 중 일등이었고
미술,문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임.졸업과 동시에 오빠 나경석의 후원에 동경으로 유학길에 오름
동경여자미술학교(일본사립여자미술학교) 유화과 입학, 이때부터 이름을 명순에서 혜석으로 바꿈.

1914년(18세) 유학생활에서 금새 유명해짐,당시 같은 유학생인소설가 춘원 이광수와
횡보 염상섭 등과 교우를 맺는다.유학생들이만든학지광(동인지)에 여성의 권리를 부르짖는
"이상적부인"(혜석이 발표한 첫글이자 우리나라 최초로 여권을 주장한 사회적글)발표.
드디어 사랑이 찾아온다.그녀의 첫사랑의 주인공은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은
게이오 대학생 (최승구1892~1916,호:소월)

1915년(19세)1월, 2학년의 제 3학기인 이해 1월부터 아버지의 결혼 강요로 학교로 돌아가지
못하고 휴학했다. 아버지의 엉뚱한 결혼 권유에 맞서 여주공립보통학교 교원으로 1년간 근무하면서 돈

을 모았다. 12월 10일 아버지 나기정 사망. 이해 말 최승구는 결핵 병세가 악화되어

조선으로 돌아가 전남 고흥 군수로 있던 형 최승칠의 집에서 요양함

1917년(21세) 결혼까지 약속 했던 그녀의 첫사랑 최승구가 폐결핵으로 갑자기 죽게되고
혜석은 허무와 고독에서 몸부림 치며 자살기도를 하나 실패한다.
최승구는 죽으면서 나혜석을 부여잡고 "혜석아...혜석아..."를 숨가쁘게 불렀다고 한다.
그 후 혜석은 비워진 마음을 달래기 위해 춘원 이광수와 가깝게 지냈는데 이에 대한
소문은 지금까지도 수수께끼다.춘원은 당시 와세다 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적을 둔 학생신분으로
두각을 나타내었고 고향에 일찍 결혼한 부인이 있는 몸이었다.여기에 춘원과 같은 해에 동경 유학을간

의학전문의 학교에 다니던 허영숙(후에 이광수의부인)과 열렬한 연애 중이어서 혜석의 오빠가
적극 만류하였다.

1918년(22세)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면서 경도제대 법가 출신의 웅변가 김우영이 혜석에게 적극적으

로 접근.첫사랑과 춘원 이광수와의 이별에 상처를 앓고 있던 그녀는 그를 어물 어물 받아들임.

김우영은 첫부인과 사별했는데 이를 안 혜석의 집안에서 엄청난 반대를 했고 유학생들 사이에도

비난의 소리가 드높였다.마침내 집의 강제 귀국명령을 받고 미술학교 졸업 1년을 남긴채 현해탄을 건너

온다.집안의 중매 결혼 설득에 불응하고 함흥 영생중학교 선생으로 잠시 있다가 서울 정신여학교로

옮긴다.

1919년(23세) 1월 21일로부터 2월 7일까지 「매일신보」에 '섣달 대목'이란 주제로 5회.

'초하룻날'이란 주제로 4회, 모두 9점의 만평을 연재함.
3월초 서울의 신마실라(이화학당 교사), 박인덕(이화학당 교사), 신준려(이화학당 교사), 황에스터(黃愛

施德, 호적명 황애덕,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 학생),김마리아(정신여학교 출신 동경유학생)등과 이화학

당 지하실에서 비밀 회합을 가지며 3.1운동에 여학생 참가 계획을 추진하다가 체포되었다.
8월 4일 5개월간 옥고를 치른 뒤 경성지방법원의「면소 및 방면」결정으로 풀려남. 풀려 난 뒤 정신여학

교 도화(미술)교사로 재직. 11월 3일 어머니 최시의 사망

1920년(24세) 4월11일 9월 조선노동공제회의 기관지인

「공제」창간호에 판화 <조조(早朝)>를 발표했다.
4월「신여자」제2호에 판화 <저건이 무엇인고> 발표.
4월 10일 정동 예배당에서 김필수 목사의 주례로 김우영과 결혼했다. 나혜석과
김우영은 이 날의 동아일보에 청첩장을 내었고 또한 같은 신문에 이들의 사
진과 함께 결혼 소식이 보도되었다. 결혼 후 신혼 여행 대신 김우영과 함께
전남 고흥군에 있는 최승구의 묘지에 찾아가 비석을 세우고 돌아왔다. 여
름, 첫 딸 나열을 임신한 탓인 듯 정신여학교를 그만 두었다.
6월 김우영과의 약혼시대를 회상한 「4년 전의 일기 중에서」를 신여자 제4호
에 발표(3월 집필). 동지에 <김일엽 선생의 가정생활>을 그린 4장의 목판
화를 발표했다. 임신을 했다는 초조감으로 2개월간 일본 생활. 이 시기가
가장 알차게 공부한 보람된 시기라고 회고함.

김우영은 서른다섯살에 전처 소생이 딸린 변호사며,
최린,이갑선,최남선등과 가까운사이이며 뒤에 동아일보 창간 발기인이 될정도로 거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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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결혼식사진

1921년(25세) 우리나라 여성으론 최초로 유화개인전을 가졌다.매스컴은 그녀의 결혼에 이어 이 전시

회 소식으로 바빴고,그림 한 점에 삼백원(당시평균월급20원)에 팔릴 만큼의 대성황과 대흥행을 이룬다.

인사동 그녀 집 문턱은 문화계,사회각계 거물들이 드나들어 닳을 지경이었고,
동아일보에 "한복의 전통미를 살리되 유방을 압박하는 비위생적인 결점은 반드시 시정되어야 한다"
는 글을 발표한다.1회 서화협회전에 고희동 화가와 함께 유화작품을 출품한다.

1922년(26세) 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유화<봄>,<농가>출품하여 홍일점으로 입선

1923년(27세) 남편 김우영이 일본 외무성 관리로 들어가서 만주 안동현 부영사로 부임하면서
함께 만주행을 나선다.만주에서도 그림에 열중하여 2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한다.
9월,서울에서 발족한 고려미술회 동인으로 가입하고 동인 전시회를 갖는다.

1924년(28세) 4회 조선미전에 3등입선,이즈음 고국으로 다시 돌아온다.

1926년(30세) 5회 조선미전에 또다시 특선으로 뽑히면서 다시 한 번 세상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1927년(31세) 6월19일 여성으로서는 한국 최초로 구미여행과 동시에 파리 유학길에 오르다.
남편 팔짱을 끼고 시베리아,파리,런던,스페인,미국 등지 여행,외국에서 예술혼을 불사르며
외교관 부인으로서, 한국의 여성 선각자로서의 뿌리를 확고히 심어간다.

1928년(32세)그녀를 파멸로 몰고 간 최린과의 사랑이 싹튼다.최린은 천도교 교령이었고

민족의 지도자로 군림하던 사람이다.당시 혜석은 파리에 있고 남편은 베를린에 있었던 시기다.

1929년(33세) 1월 파리를 떠나 미국으로 가다,3월 태평양을 횡단하는 여객선을 타고 부산에 도착했을

때, 그녀 자신은 물론 그를 맞아주는 가족들은 달라진 점이없었다.
9월 외국에서 그림 그림들을 수원불교 포교당에서 전시회를 갖고
<구미를 만류하고 온 여류화가 나혜석씨와의 문답기>라는 제목의 인터뷰 실림.

1930년(34세) 불란서에 유학중이던 사람들이 귀국하면서

혜석과 최린과의 로맨스에 대한 소문이 퍼짐.그러나 작품활동에 매진.

1931년(35세) 결혼 십년만에 이혼한다.불란서에서 유학하고 싶던 사람들이 하나 둘 귀국하면서
최린과 혜석의 로맨스가 남편과 가족의 귀에 들어가면서 남편 김우영은 "우리 이혼합시다"라고 외친다.

동아일보가 처음 으로 공식적인 기사를 다루었으나 최린의 지시에 의해 압수되고

배포는 금지된다.10회 조선미전에 특전.

1932년(36세) 이혼의 아픔속에서도 창작에 몰두.

11회 조선미전에 작품 출품하고 잡지에도 글 연재

1933년(37세)3월.종로구에<여자미술학사>를 열고 미술연구생을 모집해서

돈을 받고 그림을 가르침.직접 돈을 벌지 않으면 안될 처지에 놓인 것이다.

1934년(38세) 두가지 사건 일어남.
첫번째,한국여성사,세계여성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이혼공개장 <이혼고백서>를 2회 연재.
두번째,최린이게 보상비 청구 소송제기.

당신 때문에 이혼을 당했으니 나를 책임지라는 내용의 재판 청구
세상은 나혜석에 대한 수근거림으로 들끓었고 최린은 권력과 재력을 이용해 기사가 실린 동아일보 압수

하고 정식 재판에 가기 전 일정액의 돈을 지불하고 재판 취소하여 불을 끈다.
혜석은 그돈으로 파리행을 결심하나 실패로 돌아감.

1935년(39세) 무려200점에 달하는 많은 양의 작품을 조선관 전시장에 선보인다.
하지만,정신적인 폭풍은 멈추지 않는다.

1937년(41세) 파리행이 무산되자 수덕사 절로 들어간다.
입산 직전 <애정에 우노라>,<어미와 딸>,<연애와 육욕관>이란 글에서 사랑과 모성애 때문에
슬퍼하는 혜석의 모습이 보인다.

1938년(42세) 이때 쓴<해인사의 풍관>이란 글이 마지막 글이 됨.

1939년(43세) 정신분열.돈 한푼 없이 수덕사를 박차고 거리로 나온다.
정신착란증세와 사지마비가 오고 경련이 인다.초라한 몰골로 남편 김우영 앞에 나타났지만,
단호하게 내쫓김 당한다. 자식들을 보기 위해 먼발치 학교길에 서있다는 소문을 들은 김우영이
경찰을 동원하여 대전땅에 발을 못 딛게 멀리 추방시킨다.

1944년(48세) 서울 인왕산 청운양로원에 최고근이라는 불명으로 들어간다.
양로원 원장은 혜석의 오빠와 친구였고 양로원으로 데리고 간 사람은 그녀의 올케 배숙경이다
마흔 여덟의 나혜석은 늙고 일그러진 탓에 환갑을 넘은 노파로 주위 사람을 속였다.

1945년(49세)정신이상이 심하고 건강이 안좋아서 양로원에 있는 게 불가능해서
안양 경성보육원 농장으로 옮기지만 다시 행방을 감춘다.

1946년(50세) 바람 불고 눈보라 휘날리는 날,길 가던 행인의 등에 업혀 서울시립남부병원에

실려오고 얼마 안있어 세상을 떠난다.하지만 여기서 수수께끼가 남는다.
당시 관보에 실린 사망자 보고엔 사망일이 1946년이 아닌 1949년으로 실렸고
현재 무덤도 남아있지 않고 시체 또한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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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고백서"

“나는 공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내 남편과 이혼은 아니하렵니다.”

그는 내 등을 뚝뚝 뚜드리며,

“과연 당신의 할 말이오. 나는 그 말에 만족하오.” 하였사외다.

나는 제네바에서 어느 고국 친구에게,

“다른 남자나 여자와 좋아 지내면 반면으로 자기 남편이나 아내와 더 잘 지낼 수 있지요.”
하였습니다. 그는 공명하였습니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서양이나 동경 사람쯤 되더라도 내가 정조관념이 없으면 남의 정조관념 없는 것을 이해하고 존경합니

다.
남에게 정조를 유인(誘引)하는 이상 그 정조를 고수하도록 애호(愛好)해 주는 것도 보통 인정이
아닌가. 종종 방종한 여성이 있다면 자기가 직접 쾌락을 맛보면서 간접으로 말살시키고
저작(詛嚼)시키는 일이 불소하외다. 이 어이한 미개명의 부도덕이냐.’

<삼천리> 1934년, 8-9월(전집, pp.406-426.)


"이상적 부인"

… 습관에 의하여 도덕상 부인, 즉 자기의 세속적 본분만 완수(完守)함을 이상이라 말할 수 없도다.
일보(一步)를 경진(更進)하여 차 이상(以上)의 준비가 없으면 아니될 줄로 생각한 바요,
단(單)히 양처현모(良妻賢母)라 하여 이상을 정함도 필취(必取)할 바가 아닌가 하노라.
다만 차를 주장하는 자는 현재 교육가의 상매적(商賣的) 일호책(一好策)이 아닌가 하노라.

남자는 부(夫)요, 부(父)라. 양부현부(養夫賢父)의 교육법은 아직도 듣지 못하였으니,
다만 여자에 한하여 부속물된 교육주의라. 정신 수양상으로 언(言)하더라도 실로 재미없는 말이라.
또 부인의 온양유순(溫良柔順)으로만 이상이라 함도 필취(必取)할 바가 아닌가 하노니,
운(云)하면 여자를 노예만들기 위하여 차(此) 주의로 부덕의 장려가 필요하였었도다.

……

연하면 현재의 우리는 점차로 지능을 확충하며, 자기의 노력으로 책임을 진(盡)하여 본분을
완수하며, 경(更)히 사(事)에 당하여 물(物)에 촉하여 연구하고 수양하며, 양심의 발전으로
이상에 근접케 하면 그일 그일은 결코 공연히 소과(逍過)함이 아니요.
연후에는 명일(明日)에 종신(終身)을 한다 하여도 금일 현시(現時)까지는 이상의 일생이 될까 하노라.

…어떠한 길을 향하여 무한한 고통과 싸우며 지시한 예술에 노력코저 하노라.

1914년 11월 5일

<학지광>, 1914.12 (이상경 편, <나혜석 전집>,태학사, 2000, pp.184-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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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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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죽교, 목판에 유채, 23x33cm, 개인소장
자신의 운명을 비참하게 만든 최린을 상대로 법정 소송을 준비할때
변호사에게 돈 대신 줄려고 그린 그림이다.
나혜석의 고독 절망과 생활고에서 그린 그림이라 기량의 난조를 보이고
유채물감을 엷게 절약해서 사용한 흔적이 역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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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풍경, 합판에 유채, 15x22cm, 개인소장

어떻게든 피할려고 했지만,결국 이혼을 당하고 그린그림이다.

유채물감을 제대로 쓸 수 없었던 경제적인 어려움이 그대로 나타나며

작품기량도 많이 떨어진게 역력히 드러난다.

이 당시 그린 그녀의 작품을 보고 누군가 이런말을 했다.

"오히려 그 작품들을 대하지 않았던들 옛날의 기억이 남았을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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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솔사, 합판에 유채, 54x69cm, 개인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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