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晶月) 나혜석(羅蕙錫) /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만주봉천 풍경 1924
프랑스 마을 풍경 1928
무희 1928
선죽교 1933
인천풍경 1933
화령전 작약 1935
다솔사 1937
정월(晶月) 나혜석(羅蕙錫) (1896~1946)
나혜석은 신문학을 존중하는 개화되고 부유한 가정에서 기정의 5남매 중 둘째로 경기도 수원시 신풍동에서 태어났다.
도쿄에 유학중이던 오빠 나경석의 권유로 1913년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유화를 전공했다.
유학시절에는 최승구·이광수와 사귀면서 동경 유학생 동인지였던 〈학지광〉에
여권신장을 옹호하는 <이상적 부인〉등의 글을 발표했다.
191년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함흥 영생중학교, 서울 정신여자고등학교 미술교사를 지내다가
3·1운동에 참가 후 체포되어 수개월간 투옥되기도 했다.
1920년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했고, 남편의 도움으로 1921년 서울 경성일보사 내청각(來靑閣)에서 첫 전람회를 열었다.
이 전람회는 서울에서 열린 최초의 서양화전시회로, 〈매일신보〉의 기사에 의하면
"낙역부절하여 인산인해(絡繹不絶人山人海)였다"고 할 정도로 대성황리에 열렸다고 한다.
1923년 일본 외무성 관리가 된 남편을 따라 만주에 거주했다.
어쨌든 3·1운동으로 인해 옥고를 치룬 민족의식이 강한 여성이 친일파인 남편과의 결혼 및 공존은 아이러니한 측면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1927년 모스크바를 거쳐 프랑스·영국·이탈리아·스페인 등을 여행하면서 미술관과 박물관을 견학하고 파리에서는
당시 유행하던 풍조인 야수파 계열의 그림을 그렸다.
참고로 20년 후배인 이중섭도 야수파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도 당시 시대적인 흐름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제1~11회까지 조선미술전람회에 9번 출품하여 제3회 때 〈가을의 정원〉으로 4등상, 제4회 때 〈낭랑묘 娘娘廟〉로 3등상,
제5회 때 <천후궁 天後宮〉으로 특선을 받았다.
유럽 여행중 사귄 최린과의 만남이 문제가 되어 귀국한 뒤인 1931년 남편 김우영과 이혼했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중의 한 사람이었던 최린은 천도교 도령(道領)으로 1926년에
구미 여행길에 나서 미국을 거쳐 파리에 도착한 것이었다.
일제시대 대표적인 친일파 최린이 1933년 친일을 선언하였으니 최린의 친일선언 이전의 나혜석과의 관계가 문제되었을 것이다.
이혼 당시 나혜석의 나이 35세였다. 그 뒤 사회의 인습적인 도덕관에 저항하는 〈우애결혼, 실험결혼〉·
〈이혼고백서〉 등 자신의 입장을 강변하는 글을 발표했으나 보수적인 사회의 냉대로 점점 소외되었다.
1935년 생활비를 벌기 위해 전시회를 열었지만 주목받지 못했다.
그 뒤 친구인 김일엽이 수도중인 수덕사와 해인사 등을 전전하며 유랑생활에 들어갔으나 상당히 곤궁한 생활을 추측할 뿐으로
정확한 행적을 알 수 없다.
1946년 서울 자혜병원에서 행려병자로 쓸쓸히 인생을 50세의 나이로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