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이 낳은 名家 名人 3대 !!!

샬롬 1 4,201 2013.03.21 13:55

2010년 '숙명 가족상' 수상자, 이필순 동문(국어국문, 56년 졸) 가족과의 만남

숙명이 낳은 名家 名人 3대 !!!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것을 사실이라고 믿기는 쉽지 않다. 설령 확신하는 진실이라 할지라도 전달 대상이 가족이라면 돌다리 두드리듯 신중을 기해 생각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피난한 우리 대학 천막 캠퍼스에서 신입생 입학식을 치른 이필순 동문. 그녀는 58년 전부터 확고한 숙명의 자부심을 딸과 손녀에게 그대로 전달해 ‘숙명 3대’를 이루었다.



“미국에서 어젯밤 도착했어요. 제가 졸업한 지 벌써 60여 년이 다 되어가는데 이렇게 후배들 앞에 서게 되다니 꿈만 같군요. ”

올해 신입생 환영회가 열린 올림픽홀 귀빈 대기실에서 여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이필순 동문. 긴 비행시간에 심신이 피곤할 법도 한데 칠순을 넘긴 나이에도 이필순 동문의 모습은 지난 세월이 무색할 만큼 당당하고 건강했다. 이제 곧 무대에 올라 손녀뻘의 후배들 앞에 설 예정인데 무대에 익숙한 아나운서처럼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드디어 올해의 숙명 가족상시상이 있겠다는 사회자의 멘트와 함께 그녀가 호명되었다. 신입생들의 뜨거운 박수와 호기심 어린 시선이 일제히 그녀의 얼굴에 꽂혔다.

“인생 삼모작이란 생각을 해봅니다. 한 해 세 번 수확하는 기쁨처럼 우리 3대가 반세기에 걸쳐 귀하고 기쁜 기록을 숙명에 남기게 되어 영광입니다.” 마치 오랜 시간 쌓아온 인생 경험을 한순간에 되돌린 듯 무대 위에 선 이필순 동문의 얼굴은 10대 소녀처럼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숙명인

“오늘 숙명에 입학한 신입생들에게 쿨하게 하고 싶었던 말이 있습니다. 자신의 외모를 성형하듯 지식도 성형할 줄 아는 여성이 되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세계 무대에도 당당히 설 수 있습니다”

이미 명문 사학으로 국내외에 입지를 확장 중인 모교 소식과 발전상은 미국에까지 전해졌다. 교사도 없이 공부해야 했던 이필순 동문의 재학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눈부신 발전이 미주동문회와 언론매체를 통해 널리 알려진 것이다. 그때마다 이필순 동문은 처음 모교에 발을 디딘 1952년을 떠올렸다.

한국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52년 진주여고를 졸업한 이필순 동문은 부산에 임시 캠퍼스를 마련한 숙명여대에 입학했다. 1년 전인 1951년 12월 1·4 후퇴로 부산에 피난 중이던 우리 대학은 동대신동에 가교사를 건축하고 신입생을 맞이했는데, 그해에 제1회 학사 학위 수여식이 열렸다. 당시 집안 어른들은 황실의 전통과 민족 사학의 기치를 간직한 최고 여성 고등 교육기관이라며 이필순 동문의 입학을 적극 권유했다. “당시 교훈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오늘 보니 지금도 바뀌지 않았어요. 정숙, 현명, 정대인데 세 단어의 끝말을 이으면 숙명대가 되지요.”

놀랍게도 이필순 동문이 기억하는 건 교훈만이 아니었다. 올해의 숙명 가족상 수상 소식을 들은 날 밤부터 서울행 비행기에 오를 때까지 귓가에 교가가 맴돌았다고.

숙대신보 초대 편집장과 학도호국단운영위원장

이필순 동문의 숙명 사랑은 그 뿌리가 깊다. 입학 후 기숙사에서 우수한 성적과 봉사 정신으로 다른 학생의 모범이 되었고, 최고 학년인 1955년 에는 숙대신보 초대 편집장으로 창간을 도왔으며, 지금의 학도호국단운 영위원장(현재 총학생회장)을 역임하며 리더십을 발휘했다.

“예나 지금이나 공부가 좋습니다. 지금 시애틀에서 3~5월 그리고 9~11월 개강하는 실버 스쿨을 다니며 시문학과 수필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가을에는 시화전에도 참가하고<은빛>이라는 연보에 글을 기고하기도 했지요.”

이필순 동문은 숙명의 숭고한 교육 이념과 정신을 인생을 통해 실천한 셈이다. “며느리도 숙명여대 출신을 맞이하고 싶었는데 뜻을 못이루었어요(웃음).”

모처럼 고국을 찾은 이필순 동문은 학교를 방문, 새롭게 단장한 캠퍼스를 돌아보고 후배들에게 많은 인생 조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미국으로 출국하기 전 짧지만 의미있는 메시지를 남겼다.



미니인터뷰

이필순 동문의 손녀 김보미(09학번 영어영문학부)

입시를 앞두고 제 성적에 맞는 학교 선택에 골몰하고 있을 때 할머니께서 직접 미국에서 전화하셨어요. 망설이지 말고 엄마처럼 숙명여대에 가라고. 곁에 계시던 엄마와 이모께서도 겉으로는 제 생각을 존중한다고 하셨지만 숙명여대에 대한 자랑이 끊이지 않았어요.

무언의 압력(?)이었던 셈이죠. 현재 우리 대학 회화과 교수로 계시는 고모(김현화 교수)께서도 제가 할머니를 닮아 글솜씨가 좋고 책을 많이 읽는 습관을 지녔다며 숙명여대에 잘 어울린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입학한 지금, 저는 후회하지 않아요. 오히려 숙명 3대인 것이 무척 자랑스럽습니다. 앞으로 결혼해 딸을 낳으면 할머니와 엄마처럼 저도 숙명여대에 보내 4대를 잇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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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샬롬 2013.03.21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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